정창원 소장품과 통일신라
최재석 / 일지사 / 1996년 1월
평점 :
절판


언젠가 세노 갓파妹尾河童라는 일본인이 지은 <펜 끝으로 훔쳐본 세상>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이 책의 한 부분에 자물쇠를 그린 그림이 있었다. 설명을 보니 에도江戶시대 일본의 열쇠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그러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책을 찾아보니 그림으로 그려진 열쇠의 대부분이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된 제품과 유사한 그림이었다. 정창원이란 도다이지東大寺란 절에 딸린 창고의 이름인데 이 창고에는 일본이 세계적으로 자랑한다는 여러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일본의 주장은 이 유물이 일본과 당의 교류 혹은 교역에 의해 유입된 제품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많은 사람들은 정창원 유물의 전모를 알지 못한다. 일본은 매년 약 20일간에 걸쳐 나라 박물관에서 정창원 소장의 유물 20점씩을 공개하고 있다. 정창원의 유물이 대략 8천여점이니까 이 유물을 다 전시하는데 400년의 세월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일본은 이 정창원의 물품을 문화재로 취급하지 않고 왕실의 재산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정창원의 유물관리도 문화청이 아니라 왕실의 행정을 담당하는 궁내청이 관리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일반인이나 학자들은 정창원 소장의 유물의 촬영이나 관찰, 출입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다만 일본정부에서 임명한 소수의 학자들만이 이 유뮬에 접근하여 연구하게 할 뿐이다. 그러므로 정창원 유물에 관한 것은 일년에 20일간 열리는 나라 박물관의 전시회와 이들 학자들이 내놓는 보고서뿐이다.


이런 상태이기 때문에 정창원 유물에 대한 학설은 일본의 일방적인 주장뿐이다. 중국은 일본이 이들 유물이 당나라시대의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굳이 여기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중국은 자신들의 역사적 자존심만 건드리지 않으면 굉장히 우호적으로 보인다. 일본의 이러한 주장에 한국의 학자들만이 외롭게 투쟁하고 있지만 그 역시 유물이란 실재가 보이지 않는한 어려운 작업이다.


그럼에도 그동안 발표된 보고문과 박물관 전시품의 도록과 같은 것을 중심으로 우리가 발굴한 통일신라 시대의 유물과 비교하여 정창원 유물의 실체를 밝혀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 책은 빛나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 책에서 저자는 감상적인 민족주의적 시각보다는 냉철한 학자적 시각으로 정창원의 유물을 비교하는데 15가지의 비교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정창원 유물의 제작시점인 8세기경의 일본이란 나라의 문화적 역량이다. 저자는 과연 8세기 경에 일본이 이런 유물을 만들 능력이 있었는지, 그리고 당시 일본의 造船능력과 항해능력, 통일신라와 일본의 정치.불교관계, 출토된 통일신라시대의 유물과 정창원의 유물 비교, 정창원 소장품의 문양과 신라의 문양비교등 모두 15가지의 비교시각을 가지고 기술하고 있다. 이 결과 저자는 정창원 유물의 거의 대부분이 신라에서 제작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다만 우려스러운 것은 일본측의 태도이다. 일본은 정창원의 유물에 제작국을 표시하는 대신 선박에 실려 왔다는 뜻인 <舶戴品>이란 용어를 사용하거나 근거의 제시도 없이 당에서 왔다거나 일본에서 제작되었다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정창원 소장품의 제작국이 일본이라고 명시되는 물품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역사에 이어 유물에서도 왜곡을 시작하고 있다. 일본의 이러한 조작은 가미타가모리上高森유적에서처럼 자신들의 역사적 우월성을 위해서라면 무룰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의를 요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일본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하나의 도구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노학자의 분투로 또 하나의 날카로운 역사적 무기를 갖게 되었다. 이 점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한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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