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볼프강 벤츠 지음, 최용찬 옮김 / 지식의풍경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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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제3제국의 조직적인 유대인 학살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종전후 나치 강제수용소의 참상이 밝혀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가졌다. 물론 승전국인 연합국은 이와 관련된 사람들을 뉴렌베르그 재판에 기소하였지만 하나같이 자신은 책임이 없으며 상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하였다. 그리고 피고인들은 하나같이 <왜, 내가...?>라는 항변으로 일관 하였다.  전범들의 이런 심리는 일반화되어 대량학살의 계획입안자인 루돌프 아이히만 조차도 아르헨티나에서 납치되어 이스라엘로 이송되어 재판을 받기 전에 쓴 자술서에서 유대인 학살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완강히 부인하였을 정도였다. 사정이 이러하다보니 많은 사람들은 유대인 학살이 히틀러의 아집과 망상, 또는 <나의 투쟁>에 기록된 극단적인 인종주의에 입각해서 저질러진 나치의 조직적 범죄가 아니라 독일민족 전체가 떠안고 가야할 업보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고였다. 이런 세계인들의 심정을 알고 있는지 독일은 1978년 전범들에 대한 공소시효를 없애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제 독일에서 반인류적인 범죄자는 공소시효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은 유대인 학살을 이러한 민족적 집단 만행이라는 도식적인 틀에서 벗어나 누가, 언제, 어떻게,왜 이런 범죄를 기획하고 자행했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저자는 이 야만적 행위의 시발을 1941년 1월 20일 한적한 베를린 주택가인 <암 그로센 반제>에서 제국 보안부의 부장이며 경찰 및 비밀공작기관의 우두머리였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유럽 유대인 문제의 총괄적 해결>이란 주제를 가지고 공동회의 주최한데서  찾고 있다. 이는 이전부터 독일 사회에 만연해 있던 반유대주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었다. 다만 그 방아쇠를 이 회의에서 제공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이드리히는 반유대주의를 하나의 주제로 묶어 일시적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침묵을 했는데 역사가들은 이를 침묵은 찬성이란 등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때 하이드리히의 요청을 받고 회의에 참석한 인물들은 나치독일의 차관급 인사에 해당되는 13명의 간부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나치 독일의 의전상 세 번째 서열의 지도자급에 속하는 거물들이었다. 이들은 각각 내무성, 법무성, 동부 점령 지구 담당성, 수상 비서실, 나치당 대표 비서실, 외무성, 4개년 계획 담당청, 크라쿠프의 총독을 대표하는 인물들로서 실제적인 실무를 담당하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이들 외에도 회의록을 책임진 아이히만과 지금까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타이피스트까지 합하여 총 16명의 인간들이 모여 대략 1천 1백만명의 목숨을 식사를 하면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모임에는 군부와 앞으로 유대인을 이송할 교통성과 제국 철도의 대표, 유대인 재산 약탈의 책임을 맡았던 재무성의 대표자들은 초청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들 집단이 집단 학살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이들 조직과의 유기적인 연대가 무난했기 때문에 초청받지 않았을 뿐이었던 것이다.


이 반제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최종적 해결>이란 단어로 알려진 것이다. 이들은 최종적 해결이란 <유대인들을 적절한 방식으로 강제노동에 투입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레 쇠약해져 사라질 것이고, 끝까지 버티는 소수는 그에 따른 적절한 조치가 취해져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결정한 개략적인 사항은 상부로 보고되어 상세한 세부계획을 세우게 되고 이에 따라 독일 국내와 동부의 점령지대에 거대한 살인공장이 건설되게 된다. 이 학살공장의 가동은 전 유럽의 모든 유대인들을  최종적인 해결책에 의해 완전 소멸할 때까지 지속되어야한다고 결정되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유대인 학살에 대한 독일민족 전체의 원죄라는 모호한 책임론을 명확하게 규정함으로서 독일 민족 전체에 덮씌워진 원죄의 사슬을 끊어내려한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일정 부분에서는 효과를 거두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독일 정부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 정부는 전후 초대 수상 아데나워에서부터 현재의 슈뢰더에 이르기까지 나치시대에 대한 모든 것을 철저하게 반성하는 것을 되풀이하고 있다. 초대 수상 아데나워는 드골의 프랑스와 화해를 하기 위해 온갖 수모를 견디며 파리를 방문하였고, 이것은 이후 독일 수상들은 취임후 파리를 방문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그리고 브란트 수상은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방문하여 무명용사의 무덤 앞에서 비가 오는 가운데 무릎을 꿇고 진심어린 화해를 요청하였다. 이러한 이웃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두터워져 독일은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그 시작이 바로 나치 시대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비판이었다.  


저자는 홀로코스트 문제를 다루는데 가장 어려운 점은 최고 결정권자들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홀로코스트 문제는  집행자였던 하수인들의 증언에 의지하기 때문에 커다란 틀 속에서 이 문제를 볼 수 없고 작은 틀 속에서 보기 때문에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보고있다. 아주 타당한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예로 일본의 경우 천황의 책임론이 거세된 가운데 태평양 전쟁에 대한 논의를 하기 때문에 정확한 실체에 접근하기가 곤란한 것이다. 95년에 독일에서 발간된 이 책은 통일 이후 유럽 중앙부의 거대한 국가로 자리매김한 독일이 홀로코스트의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독일은 아직도 반성중이며 앞으로 강대국으로서 책임있는 행동을 할 수 있으며 충분히 유엔의 상임이사국에 진출할 도덕적 능력과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일본은 경제적 능력으로는 가능하지만 도덕적 능력에서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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