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와 우연의 역사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자작나무 / 1996년 5월
평점 :
품절


<다음날, 달력상으로는 성 미카엘의 날에 드디어 발보아는 스믈두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해변에 나타났다. 발보아는 성 미카엘처럼 무장하고 검을 차고서 장엄한 의식처럼 새로운 바다를 소유하려 했다. 그는 곧장 물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마치 물의 주인이자 지배자인 양 오만하게 나무 아래에서 쉬면서 기다렸다. 파도가 밀려와 순종하는 개처럼 혓바닥으로 자신의 두 발을 쓰다듬을 때 까지>

 

이 장면은 드 발보아가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태평양을 발견하고 그 물에 발을 적시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이 대목이 바로 광기와 우연의 역사를 상징하는 최고점이라고 생각했다. 한 평범한 사나이가 어떻게 해서 세계사속의 인물로 등장하게 되는지를 츠바이크는 담담하면서도 장엄한 문체로 기술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가 영웅이나 대중의 힘이 아닌 광기와 우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던 스테판 츠바이크... 그는 유럽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던 위대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하루 아침에 붕괴되어 소국으로 전락하는 것을 보면서 역사의 법칙성에 의문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츠바이크에게 광기와 우연은 아주 적절한 단어였는지도 모른다.

 

그는 광기와 우연을 날줄과 씨줄로 엮어 세계사의 뒷면을 조망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운명의 갈림길이 광기가 앞인지 우연이 먼저인지 모호해 진다. 이 책의 저자 츠바이크에게 가장 어울리는 광기와 우연의 배우는 남극에서 죽은 스콧이라고 생각한다. 스콧은 영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완벽한 사람이었다. 서류상에 나타난 근무경력이라든가 고과표는 그가  완벽한 인간임을 보여준다. 바로 그 점이 스콧의 비극이었다. 츠바이크 역시 암울한 시대-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던-를 남극의 설원에 갖힌 스콧처럼 살아간다. 아문젠이란 강력한 적수가 힘차게 남극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자신은 고장난 설상차와 얼어죽는 포니를 바라보며 남극까지 갈 수 있는가 걱정을 하는 스콧...자신의 조국을 스스로 떠나 망명객의 운명을 선택한 츠바이크...결국 종착역은 자살이었다. 츠바이크는 우리에게 광기와 우연의 역사는 이러하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준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