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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 탐구신서 110
레이첼 카아슨 지음, 이길상 옮김 / 탐구당 / 1990년 10월
평점 :
절판
1970년대 독서신문이란 주간신문의 연재 기획 가운데 미국을 움직인 25권의 책이란 기사에서 이 책을 처음 접하였다. 레이첼 카슨이란 작가의 이름은 내가 좋아하는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이라든가 <슬픈 카페의 노래>를 쓴 카슨 멕컬러스란 미국의 작가 이름과 비슷하여 자세히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 책은 가벼운 소설이 아니었다. 공해라는 단어보다 스모그라는 부드러운 이름에 익숙해 있던 당시로서는 낮선 환경 공해에 대한 이야기였다. 당시 환경 공해로 발생한 재난은 이웃 일본의 수은중독에 의한 미나마타병, 이타이 이타이 병이 유일한 것이었다. 70년대 일본은 그야말로 호황의 시대였다. 이렇게 잘나가는 나라에서 이상한 질병이 발생했다는 그 자체보다 그 원인을 10여년전에 미국에서 이미 예언하였다는 사실이 신기하였다. 하지만 한국의 사정은 언제나 그러하듯 원서가 아니면 이런 책을 읽을 기회를 마련해 주지 않았다. 제목으로만 기억하고 있던 이 책이 시간이 흘러 책방의 서가에 조용히 꽃혀있는 것을 발견하였을 때 한국에서도...란 신기함과 책에 대한 호기심으로 거금 1500원을 지불하고 지체없이 구입하였다. 그리고 읽기 시작했을 때 낮선 단어와 용어는 책 자체는 매우 흥미있는 주제를 다루었지만 진도를 나아가게 하는데 힘이 들었다. 그만큼 당시 대한민국은 공해와 환경의 파괴와는 거리가 먼 시대였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문명의 발전이란 어찌보면 자신의 육체를 가지고 아슬 아슬한 육체의 게임을 벌이는 윤락과 비슷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아주 먼 옛날, 청계천 28가라는 별칭으로 불렸던 곳이 있었다. 지금의 청계천 7가와 8가 사이였다. 그곳이 복개가 되지 않았을 때 천변을 따라 아슬아슬하게 판자집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밑으로는 시커먼 물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그곳을 지날 때 마다 걸쭉한 하천의 물을 보며, 여기가 청계천, 말 그대로 푸른 계곡에서 흘러 나온 물이 흐르는 천변이라고 누가 믿겠는가라는 농을 던지곤 하였다. 하지만 소비가 미덕이라고 줄기차게 가르치던 시절 발전 역시 미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천이 약간 더러워 진들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더러운 것은 정화하는 것이 아니라 가리는 것으로 대신하던 시절 청계천 28가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마지막까지 남아 여기가 맑은 물이 흐르던 장소였소 하며 신음하던 남았던 청계천변이 복개가 된 얼마후 서울에서 마지막 남은 시민들의 휴식처인 워커힐 맞은편 광진 해수욕장이 폐쇄 되었다. 지금 강변 북로를 한가하게 달려가는 인간들은 서초동이 포도밭이었고, 그 옆은 땅콩밭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겠는가? 그 누가 무너질 것 같은 광진교 아래에서 무더운 여름철 수박과 참외를 깍아먹으며 비치 파라솔 아래서 휴식을 취하고 물놀이를 즐겼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하겠는가? 그리고 30여년이 흘러가고 다시 청계천을 뜯어 내고 있다. 나는 희망한다. 광진교 밑에 있던 해수욕장이 다시 개장되는 날을...... 그때는 도시에 더 이상 침묵의 봄이 아닌 희망의 봄이 도래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