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험지도의 역사 - 지식의재발견 5
안재학 / 새날 / 199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730년에서 35년까지 국립 아프리카회사의 사원 겸 서기로 갬비아에서 근무한 프랜시스 무어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아프리카 내륙으로 들어가는 여행>이란 책을 기술했다. 여기서 무어는 갬비아강의 수심과 약도를 첨부하고 해안에서부터 500마일-대략 800킬로미터-을 거슬러 올라간 내지까지의 모든 도시,왕국,교역소의 위치를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그가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한 것은 숭고한 사명의식 때문은 아니었다. 곧 태동하게될 산업혁명 이후 제국주의의 발흥을 준비하는 하나의 서곡이었다.

유럽인들에게 지도는 단순히 평면위에 축소된 그림이 아니었다. 지도는 곧 힘이고 세력이었다. 한 예로 바스크인들은 콜롬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하기 수백년전에 이미 뉴펀들랜드 근처의 대구어장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그 장소를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이것은 지도상에 테라 인코그니타-미지의 땅-로 표시된 지역을 탐험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인들에게 지도상의 불명확함은 두려움이 아니라 그곳에 무엇인가 착취할 것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땅은 부와 명예를 보장하는 보험과 같은 것이었다.

제국주의가 확장하던 시절 영국은 다윈의 비글호를 출항시켜 남아메리가를 완벽하게 탐험하였다. 반면 미국은 교양인들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내셔널지오그래픽이란 잡지를 창간하였다. 영국이나 미국은 표면적인 이유로 이들의 탐험과 잡지의 창간을 교양이나 인류의 과학발전에 기여하기 위함이란 수식어로 치장했지만 실제로는 자국의 제국주의적 이익을 위한 것임을 숨길 수 없었다. 실제로 내셔널지오그래픽은 창간되자 마자 자신들의 뒷마당에 대한 철저한 탐색에 들어갔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세계는 제국주의 시대에 들어와 자세한 지도를 만드는 나라가 강대국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탐험지도의 역사 또한 행간을 읽으면서 이러한 유럽인들의 관점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정착 농경생활을 하던 동양인들에게 탐험이란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단어라면 유럽인들에게 이 단어는 대지의 수탈과 파괴의 또 다른 형태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1930년대 미국 고등학교에서 사용하던 애플턴의 지리부도를 가지고 있다. 이 지도에 지구의 절반을 넘게 차지하고 있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라이베리아,에티오피아,일본,중국,몽고,타일랜드만이 독립국으로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이 지도에는 세계의 모든 나라를 자신들의 색깔로 구분하고 있다. 영국땅은 노란색, 프랑스땅은 파랑색,미국땅은 분홍색....지도 하나에도 이렇게 다양한 역사가 기록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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