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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에서 보낸 1460일 - 사상 최악의 전쟁, 제1차 세계대전의 실상
존 엘리스 지음, 정병선 옮김 / 마티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참호전塹壕戰이란 개념은 고대나 중세 혹은 근세의 전쟁에서 고려되지 않는 전술이었다. 육체와 육체의 부딪침이 주류를 이루던 군세 이전의 전쟁에서는 격렬하게 맞부딪치는 힘과 힘의 대결이 주를 이루었다. 이런 형태의 전쟁에서는 상대의 얼굴을 보며 전투가 시작되었고, 싫으나 좋으나 상대의 모습-죽었건 혹은 부상당했건-을 보며 전투가 종료되었다. 그리고 이런 형태의 전쟁에서는 개인의 힘과 용맹이 중시되었다. 즉 전투는 집단의 어울림 보다는 개인의 영웅적인 헌신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이런 전쟁터의 낭만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남북전쟁부터였다. 남북전쟁은 처음으로 개인과 개인의 용맹이 아니라 집단과 집단의 화력이 맞부딪친 전쟁이었다. 이런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북전쟁에서 조차 병사들은 상대의 얼굴이 보일정도로 접근한 다음 사격을 개시하였다. 이런 점에서 남북전쟁은 현대전에 가장 근접하였던 고대전쟁의 형태를 띤 전쟁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전쟁의 양태가 대량살상으로 바뀌는 전환점이 보어전쟁이었다. 남아프리카에서 벌어진 식민지군대와 대영제국의 전면전은 전쟁과는 상관이 없는 민간인이 대량으로 희생된 전쟁이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 철저한 파괴와 민간인에 대한 격리 수용은 보어전쟁이 앞으로 벌어질 전쟁의 모습을 암시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포와 기관총 그리고 성능이 향상된 소총의 출현으로 전투는 상대를 먼저 발견하는 쪽이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전투는 한 장소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전 지역에서 벌어짐으로서 전 지역이 전장으로 변모하였다. 그럼에도 전쟁은 점과 점으로 이동하는 형태였다. 이렇게 된 이유는 앞으로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될 기동성이 실질적으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일차세계대전의 시작은 독일군의 신속한 기동작전으로 전개되었다. 그럼에도 독일군은 그 기동성을 끝까지 유지시킬 힘이 없었다. 이 결과 일차세계대전은 초반기 몇 달을 제외하고는 지리한 대치국면으로 전개되었다. 그 전선의 길이는 놀랍게도 북해에서 알프스에 이르는 장대한 구역이었다. 이 장대한 구역에서 양측의 병사들은 참호를 파고 눌러앉아 4년여를 대치하며 전쟁을 치루었다. 양측의 병사들은 철조망과 기관총-일차세계대전에서 가장 각광을 받은 무기-으로 보강된 참호에서 한치의 땅을 확보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만 했다. 일차세계대전의 비극은 발전하는 살상무기의 진화속도에 비해 이를 운용하는 인간들의 구태의연함이 빚어낸 것이었다. 이미 멕시코 내전 당시 판초비야의 기병대를 참호와 철조망 그리고 기관총으로 장비한 오브레곤이 물리쳤음에도 불구하고 일차세계대전 내내 기관총과 철조망 앞으로 장군들은 병사들을 내몰고, 기병대를 돌격시켰다. 전선에서 참혹한 살상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참모본부의 지도 앞에 자리잡은 장군들은 이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강철의 포화 속을 뚫을 수 있는 것은 그것보다 더 막강한 무기였지만 장군들은 불굴의 정신력만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일차세계대전이란 현대전을 경험하지 못했던 일본 군부가 이차세계대전에서 이 실패를 그대로 답습했다는 점이다.
일차세계대전의 참호전은 인간이 전쟁의 주역이 아니라 한 부분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준 전쟁이었다. 그리고 지속적인 전투가 인간의 정신과 육체에 미치는 영향을 최초로 인식하게 한 전쟁이기도 하였다. 인간의 정신력과 의지력의 끈이 전투라는 무대를 통해 처음으로 시험받은 전쟁이였다. 전투가 인간 정신에 미치는 다양한 폐해가 보고되었고,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전투의학(?)이 발전하기 위해서 1천만 이상의 병사들이 진흙탕 속에서 스러져 가야만 했다. 참호전의 이야기는 전쟁터에서 수습된 무명의 용사 여섯명의 관이 안치된 어두움 방으로 장군 하나가 눈을 가린채 인도된다. 그리고 장군이 가장 처음 만진 관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치하게 한다. 저자는 영광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아니라 어둠 속에 누워있어야할 자가 누구인가를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