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처음 백 년 동안 갇혀 있었을 때 "누구든지 나를 구해 주는 사람을 굉장한 부자로 만들어 줄 거야."라고 다짐했었지. 그러나 백 년이 지나도 아무도 나를 구해 주지 않았어. 다시 오십 년이 흐르고 또 오십 년이 흘렀을 때 나는 "누구든지 나를 구해 주는 사람에게 보물 묻힌 곳을 모두 가르쳐 주리라."고 생각했어. 그러나 아무도 나를 구해 주지 않았고 그렇게 사백 년이 흘러갔지. 그래도 나는 "누구든지 나를 구해 주면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리라."고 다짐했지. 그런데도 나를 아무도 구해 주지 않았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어. 그래서 나는 굳게 마음 먹었지. "이제 누그든지 나를 구해 주기만 하면 당장 죽여 버리고 말겠다."고.... <아라비안나이트, 어부와 지니 중에서>

어린 시절 이 이야기를 읽으며 왜 호리병 속의 정령은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을 죽이려고 했을까?하는 의문이 들었었다. 단순히 자신을 오래 동안 기다리게 하였기에 화가 났던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초라함에 화가났던 것일까. 확실했던 것은 어린 시절 이 이야기를 여러 번 읽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해답은 어른이 되어서 어른의 사고방식으로도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나에게 그림형제의 전래 동화 역시 이런 사고 방식의 길을 따라 걸었다. 아주 쉽게 읽어내려갔지만 어른의 심정으로는 결코 그 핵심을 집어낼 수 없는 세계. 바로 전래 동화의 세계였던 것이다. 그런데 브루노 베텔하임의 <옛 이야기의 매력>이란 책을 읽으면서 그 전래 동화의 히미함이 서서히 걷히는 느낌을 받았고, 어린이 동화의 색다른 면에 자극을 받았다.

저자는 <호리병 속의 지니>란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부모가 몇 주 동안 해외여행을 떠난 세 살 짜리 소년의 이야기를 같이 병행하고 있다. 세 살 짜리 어린이는 부모가 떠나기 전에는 말을 꽤 잘했고, 부모가 없는 동안에도 자신을 돌보는 보모와 타인과도 말을 잘 하며 지냈다. 보모의 증언에 따르면 아이는 부모가 없는 며칠 동안은 부모를 애타게 찾았고, 일주일이 다되가자 부모가 돌아오면 어떻게 앙갚음을 할 지에 대해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이 지나자 소년은 부모에 대한 언급을 완전히 회피하였다. 마침내 부모가 여행에서 돌아오자 소년은 입을 다물고 부모를 외면해 버렸다. 베텔하임은 이 이야기를 전개하며 <호리병 속의 지니> 역시 이런 어린이의 심리변화과정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즉 전래 동화의 세계는 이렇게 프로이드나 융의 해석-물론 이런 해석의 일면을 무시할 수 없지만-의 틀 속에서만 바라 볼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심리적 세계에서도 접근해 봐야 한다는 점을 저자는 우리들에게 제시한다. 즉 사고의 고정적 틀을 벗어나야만 현실-혹은 숨겨진 진실-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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