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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기사 윌리엄 마셜 ㅣ 한길 히스토리아 3
조르주 뒤비 지음, 정숙현 옮김 / 한길사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읽으며 우선 떠오른 생각은 중세에 장자로 태어나지 못한 자의 고단한 삶이었다. 사실 중세는 철저한 위계사회였다. 그 질서는 신으로부터 부여된 질서이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사회에서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부와 권력은 철저하게 한 사람에게만 집중되었다. 그러므로 중세에 장자-엄밀히 말하면 嫡長子-로 태어난다는 것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 외의 자식들은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이들은 잠재적인 경쟁자였기에 견제를 받았다. 그래서 차남은 일반적으로 수도원으로 들어가 마음에도 없는 성직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그리고 삼남 이하의 자식을은 자신들이 스스로 운명을 결정해야만 했다.
솔직히 십자군 운동은 신앙심이라기 보다는 몇 백년에 걸쳐 장자 상속으로 생긴 모순에 대한 유럽 중세의 돌파구였는지도 모른다. 뚜렷한 상속분이 없던 떠돌이 기사들이 자신의 몫을 챙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십자군 운동이 끝난 뒤에도 이들 버림받은 기사들은 이베리아반도로 건너가 기독교도 왕국이나 이슬람왕국의 용병이 되어 자신의 몫을 챙겼고, 아니면 튜톤기사단의 발트 정복에 협조하였다.
하지만 이들 떠돌이 기사들이 가장 확실하게 성공한 것은 노르망디의 서자 윌리엄을 도와 잉글랜드를 침공한 것이었다. 윌리엄을 따라 나선 기사들의 면모는 그당시 유럽 각국의 장자가 아닌 아웃사이더들의 명단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들 역시 자신의 상속자들에게 자신들이 걸었던 똑같은 과정을 강요하였다. 이런 가혹함(?)이 어쩌면 중세 유럽의 폭발적인 외적 팽창에 기여를 한 것은 아닐까?
위대한 기사 윌리엄 마셜은 이런 총체적인 유럽 상속문화 속의 소외자가 어떻게 자신의 상속분을 만들어가는가하는 역사의 기록인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들이 중세의 역사 속에서 흥미를 가지고 살펴봐야 할 재미있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른바 왕이 왕국의 부유한 상속녀-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점에 주의하라-를 자신의 궁전에 보물처럼 감금해 놓은 다음 기사의 충성도를 평가한 다음 그 경중에 따라 상속녀를 하사했다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기사도 시대라고 알려진 중세의 충성이라는 단어는 왕이라는 정점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자신의 직속 군주에 대한 충성이었다는 점도 흥미로운 대목이라 하겠다. 이런 충성의 상황을 이해해야만 왜 잉글랜드의 존 왕이 러미니드 초원에서 귀족들에게 허무하게 굴복하였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기사 윌리엄 마셜에서는 또 한가지 흥미로운 유럽 중세의 단면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마상창시합이다. 이 마상창시합을 통해 기사는 명성을 쌓고, 재물도 긁어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좀더 나은 사회로 도약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마상창시합은 영화속의 낭만적인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전쟁에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책략과 속임수가 난무하면서 최종적인 승리를 위해, 자신이 점찍은 전리품의 획득을 위해 몰입하는 기사들의 모습에서 중세 사회의 벌거벗은 모습을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