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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즈데이 북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노르망디의 서자 기욤이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20여년이 흐른 뒤에 잉글랜드 전역에 대한 대대적인 호구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호구조사는 잉글랜드에 대한 정복왕 윌리엄-프랑스식 기욤에서 잉글랜드식 윌리엄으로 칭호가 바뀌었다-의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그동안 윌리엄은 잉글랜드를 정복했지만 외래인으로서의 조심성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복 20여년이 흐른 뒤에 그는 전국적인 호구조사를 실시함으로서 잉글랜드에 대한 실직적 통치권을 보여주었다. 이 호구조사는 얼마나 철저하였는지 이전의 지배자의 시절부터 지금의 지배자에 이르기까지 변화된 모습을 수기로 기록하였다. 이 방대한 기록은 교회에 보관되었고, 그 보관된 기록실의 이름을 따라 둠즈데이 북으로 후세에 불리워졌다.
하지만 둠즈데이라는 단어의 종말론적인 상징성으로 인해 이 기록은 신화화 과정을 거쳐 마침내는 종말론적 상징성을 띠게 되었다. 왜 이 책은 수탈의 기록이면서 이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을까?
중세는 종교의 시대였고, 특히 가톨릭의 시대였다. 그렇기에 모든 행위의 준거는 성서에 근거할 수 밖에 없었다. 구약에 보면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자신이 왕위에 오른 다음 가장 먼저 한 일이 대대적인 호구조사였다. 그런데 다윗의 이런 행위는 예언자들의 비난을 받았고 급기야는 신의 진노를 사게 되었다. 왜냐하면 인긴에 대한 기록과 셈은 신의 행위이지 인간의 일이 아니란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성서적 기록으로 인해 윌리엄의 행위는 다윗의 행위와 비교되었던 것이다. 즉 인간이 신의 흉내를 낸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저주가 내릴 수 밖에...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이런 역사적 배경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직 둠즈데이 라는 단어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중세의 가장 처절했던 시기인 14세기 후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여기서는 인간이 아무런 중심적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페스트라는 질병 앞에서 속수무책인 모습을 보여준다. 마치 카뮤의 페스트라는 소설의 상황이 중세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악이란 부조리 앞에서 인간의 모습이 현대적이 아니라 중세적인 모습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부수적으로 펼쳐지는 미래는 우리의 현재 모습의 확대해석인지도 모른다.
이런 상상으로 소설을 읽으면 과거의 모습이 미래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즉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고 미래는 과거의 재현이라는 상투적인 어구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을 세심하게 읽다보면 과거와 미래의 대비적인 모습을 통해 그리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저자는 이런 모순과 혼돈의 세계를 대비하면서 이런 말을 남긴다. 과거나 미래를 통해서 체제에 헌신적이며 충실한 사람들은 죽을 수밖에 없고 오히려 약삭빠른 자들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고 단언한다. 작가의 이런 드러나지 않은 속마음이 '둠즈데이북'이라는 제목을 이해하는 단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