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 토킹 - 초현실주의 그룹의 킨제이 보고서
앙드레 브르통 외 지음, 정혜영 옮김 / 싸이북스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퇴근 무렵이면 어떤 ‘허기’ 같은 것이 느껴진다. 허술한 공복감, 그게 어디서 연원은 알 수 없으나 대략 직장인으로서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어떤 퇴행감의 일종임은 분명한 것 같다. 서둘러 집으로 가지 않고 교보문고쯤을 헤매거나 누군가에게 엉뚱한 통음의 제안이라도 기다리게 되는 이유도 그럴 것이다. 더불어 이 누추한 시대에 욕을 퍼붓고 불콰한 얼굴로 흔쾌한 연대감을 맛보기를 기대하는 것. 이틀 연속의 만취 덕분에 통음을 포기하고 효자동 가가린에 들렀다. 의외의 발견이라도 할 양으로.

일본 작가들의 양장본 책들 (요즘 왜 이리 일본 작가들의 번역소설들이 그리 많은지!!) 가운데서 아주 재밌어 보이는 책이 눈에 띄었다. <섹스토킹>(싸이북스) 제목이야 OL들의 은밀한 독서욕이거나 발랑까진 아해들의 욕망을 부추길 만한 것이었지만, 이런, 부제가 ‘초현실주의 그룹의 킨제이 보고서’라니, 거기다 앙드레 브르통, 만레이, 폴 엘뤼아르, 막스 에른스트, 루이 아라공, 자끄 프레베르라니, 헌책방 가격으로는 지나칠 정도인 6천원을 주고 서둘러 챙겼다.

혼자서 베트남 쌀국수를 꾸역꾸역 넘기며 책장을 넘겼다. 국수 한가락 입에 물고 낄낄대며 읽을 만큼 이들의 잡설과 요설들은 재밌다. 문학사에 굵은 고딕체로 남은 다다이스트, 초현실주의자들이 정색하고 내놓는 섹스에 대한 솔직한 정담. 문학사의 문제아들답게 비행청소년들이 뒷골목에 모여 음담패설을 주고 받는 것 같다.


초현실주의자들
피에르 나빌 : 프레베르, 자위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런 질문의 방식이라니, 너무 포멀하잖아)

자크 프레베르 : 지금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에 직접할 때는 많이 생각했죠.(그래, 너도 아픈 시절 많았구나, 근데, 지금은 남이 해주나 보지?)
피에르 나빌 : 더 이상 하기 힘든 나이가 있나요?
자크 프레베르 : 그런 나이는 없고, 개인에 따른 문제겠죠. 자위에는 거꾸로 슬픈 면이 있어요.(이 작자 누가 시인 아니랄까봐, 과도하게 정서를 주입해대기는)
피에르 나빌 : 항상 어떤 결핍을 수반하기 때문에요?
자크 프레베르 : 저한테는 그렇습니다. 항상.(오, 불쌍한 프레베르)
이브 탕기 : 저는 정반대로 생각합니다.(얘는 또 누구야?)
피에르 나빌 : 자위에는 항상 여자 이미지가 따라옵니까?(동성애자가 아니라면 그렇겠지)

자크 프레베르 : 거의 항상.
피에르 나빌 : 이 의견에 브르통씨는 어떻게 생각하죠?
앙드레 브르통 : 제 의견은 다릅니다. 자위가 받아들여지려면 항상 여자의 이미지가 동반돼야 합니다. 나이는 상관없고요. 슬플 것도 없죠. 자위는 삶의 어떤 슬픔에 대한 정당한 보상입니다. (ㅎㅎㅎ ‘슬픔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라, 얼마나 기막힌 자위에 대한 규정인가. 브르통, 네가 연애에 실패한 뒤 그거에 몰두한 경험이 있구나. 오, 두루 불쌍한.)
피에르 우닉 :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자위는 그저 작은 보상이 될 수 있을 뿐이죠.
레몽 크노 : 자위가 보상이나 위로와 관계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위는 동성애처럼 그 자체로 정당한 것이죠.(자위에 무슨 정당성 운운이니? 그냥 하면 되는 거지)
앙드레 브르통, 피에르 우닉, 벵자맹 페레 : 그것과는 아무 공통점이 없습니다!(세명이 입을 모아 떠드네. 그래, 자위랑 동성애랑 뭔 관계가 있지?)
벵자맹 페레 : 여자 이미지 없이 자위는 없습니다.(빨간책 깨나 봤군. 그게 아니라면 에두아르드 푹스가 모았음직한 외설 동판화라도.)

 

다음은 더욱 측은함을 느끼게 하는 대화의 한 대목.  


루이 아라공 : 뭐가 제일 자극적이죠?
마르셀 뒤아멜 : 여자의 다리와 허벅지, 그리고 그 다음에 성기, 허벅지와 엉덩이.
자끄 프레베르 : 엉덩이
레몽 크노 : 항문
루이 아라공 : 여자의 오르가슴에 대한 생각
마르셀 놀 : 저도 그게 유일하게 흥미로운 것입니다.
마르셀 뒤아멜 : 저도.
마르셀 페레 : 몸의 부분에 관해서는 다리와 가슴, 그 다음에는 여자가 자위하는 것을 보는 것.
만 레이 : 가슴과 겨드랑이.
앙드레 브르통 : 눈과 가슴, 그와는 별도로 도착과 관계있는 육체적 사랑의 모든 것.
루이 아라공 : 그 답의 두 번째 부분에 도착이 소모적인 한이라고 덧붙이고 싶군요.
앙드레 브르통 : 저로서는 그게 반드시 쓸모없는 것이어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크 바론 : 입, 이, 젖몽오리, 도착과 탐구와 관계된 모든 것.  


성도착자이면서 호모포비아인 앙드레 브르통, 자신의 ‘역량’에 대해 무척이나 자신이 없어 여자의 눈치를 살피는 아라공, 각기 다르다 못해 섬세하기까지 한 ‘욕망의 감각들’, 자신이 선호하는 체위와 여성의 스타일, 첫번째 성적 판타지, 어린시절의 성적 수치심, 몇번이 가능한가를 묻고 대답하는 당대의 철학자, 예술가들. 좌담의 사회자도 주도자도 없고, 가끔씩 정색하고, "그 발언의 경박한 면에 항의합니다"라고 화를 내는 이들.  벌거벗겨 보니 이 작자들도 그저 ‘수컷’일지니. 프랑스 넘들은 별 걸 다 책으로 내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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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 2011-07-19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시청각교육에 익숙한 수컷들 사이에선, '살가운 접촉'에 관한 섹스 토크야말로 크게 결여된 게 아닐까요..?^^ 남녀가 원래는 한몸이었는데 떨어져서 합일을 그리워하게 됐다는 플라톤 <향연>에서의 사랑 기원설을 재음미한다면 남자든 여자든 메마르게 꼴리기만 하는 시각적 섹스의 판타지에서 좀 헤어날 수 있잖을까요?^^ 얼마 전 노인 섹스를 과감하게 다룬 영화도 그런 점에서 다시 봐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아라공의 말마따나 "여자는 남자의 미래"라면 남자는 여자를 통해 좋건 나쁘건 자기 욕망의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 아닐까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여자는 남자의 영혼의 색조이다
여자는 남자의 떠들썩하고 기운찬 소리다
여자가 없으면 남자는 그저 신성모독
열매 못 맺는 텅 빈 씨앗이다
여자가 없으면 남자의 입은 거친 바람만 내불고
남자의 인생은 엉망으로 헝클어지고 황폐해져
제 손으로 때려 부서진다
-- 루이 아라공, '미래의 시'에서

모든사이 2011-07-20 13:45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여자는 남자의 미래일 뿐만 아니라, 절절한 과거이자 생생한 현재이기도 하지요. ㅎㅎ 아라공 글이 멋지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