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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 왕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5년 12월
평점 :
최종철 교수의 운문 번역으로 <리어왕>을 다시 읽다. 그의 번역은 행갈이와 조사의 사용이 조금 이상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이 비극의 장중한 맛을 잘 살리고 있다. 예고된 비극의 운명을 더 비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역시 시적 언술이 더 합당한 듯하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도 희미한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그 ‘맛’을 더 온전히 느끼려면 시에서 더 나아가 낭송, 그리고 암송이 맞다는 생각도 아울러 들었다. 점차 희미해져가는 기억력 덕에 암송은 불가능할 것 같고, 배우도 아닌 마당에 미친놈처럼 장중한 대사를 읊기도 어려운 일. 그냥 읽을 수 밖에.
<리어왕>은 “사랑으로 침묵하라”는 코딜리어의 방백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이 비극의 1막 1장은 리어와 세 딸들의 문답으로 시작되는데, 두 언니와 달리 코딜리어의 대답은 “없습니다”라는 말이다. 그 뒤로는 예견된 대로, 아버지와 딸이 결별하며, 두 언니가 아비를 배반하고, 치정과 권력이 얽힌 반란과 살인이 등장하고, 모두가 비극적으로 죽는다. 그러니까, 이 모든 비극의 출발점이 된 “없습니다”라는 말, 아비의 사랑에 대한 딸의 매정하리만큼 단호하고 간결한 이 말은 표상언어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언어는 우리의 마음결을 모두 담아내기에는 너무 작거나 깨지기 쉬운 그릇이다. 그럼에도 달리 도리가 없는 우리는 그 깨지기 쉬운 질그릇으로 마음과 생각을 담아내며, 그것이 온전히 타자에게로 전달될 수 있으리라 희망한다. 어쩌면 이 비극은 언어가 실어 나르는 커뮤니케이션의 한계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 행위 발생 이전에 그 언어는 “사랑으로 침묵하라”라는 전언에서 보여지듯이 ‘언어화되지 않은’ 언어 이전의 것이다. 코딜리어는 언어화할 수 없는 것을 언어화하라는 아비의 명령 앞에 ‘진실된 고백’을 하지만, 그 진실은 아비의 몰이해 속에 미끄러지고 만다.
사랑의 본질은 언어 이전의 것이다. 사랑이 있었고 그 이후에 언어가 있었다. 그러니, 본질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언어화하기 이전의 날 것 그대로, 네안데르탈인의 ‘악, 악’ 거리는 고함 그대로, 바르뜨의 말처럼 시를 탄생시키기 이전의 태초의 ‘비명’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분절화한 언어, 시피니앙과 시니피에가 정교하게 결합된 언어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배반당해 왔는가. 그 언어의 배반은 고너릴과 리간이라는 리어의 두 딸이 보여주듯이 얼마나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하는가.
<리어왕>의 전언은 그래서 노자의 그것과 닮아 있다. ‘道可道非常道’는 표상언어의 한계를 상징하는 말이거니와 오히려 언어 이전의 상태(침묵)가 진실임을 말해주는 것이다.(“진실이 네 지참금이다.”) 리어에게 딸(고너릴)은 “너는 내 살, 내 피, 내 딸, 아니 넌 오히려 내 것이라 해야 하는 내 몸안의 질병이고 내 썩은 피가 만든 부스럼, 페스트 발진이나 부풀은 옹이”와 같은 존재다. 다시 말해, “너는 나다”, 너=나라는 등식 속에서 타자와 타자를 매개하는 언어란 무슨 소용인가. 아니 그것은 불필요한 표상이자 매개가 아닐 것인가. 그러니, 사랑하는 이들이여, '언어의 감옥'에 갇히지 말고, “사랑으로 침묵하라.”
이 비극의 또다른 기획자 에드먼드는 글로스터 백작의 서자다. 아주 오래전 세익스피어를 인용하기 좋아하는 평론가 최원식은 “우리는 자연의 은밀한 욕정에 힘입어 지루하고 맥빠지고 싫증난 침대에서 잠결에 태어난 멍청이 한 족속을 낳는데 들어가는 것보다, 더 많은 자질과 맹렬한 정기를 부여받았는데?”라는 대사를 인용한 적이 있다. 사랑없는 결혼보다 결혼없는 사랑의 건강함을 예시하며 인용한 것이었는데, 이 말이 에드먼드의 대사라는 것을 <리어왕>을 다시 읽고서야 알았다.
부부의 나른한 침대보다 저 야생의 들판에서 태어난 아이(사생아)가 더 훌륭하고 건강하다는 게 최원식의 말이었다. 그러나, 에드먼드는 이 작품에서 음모가, 두 딸 사이를 오가는 바람둥이, 권력욕망에 사로잡힌 자, 아비와 형제를 배반한 자로 등장한다. 그의 말대로 사생아에 대한 옹호는 아니었던 것. 인용이 맥락을 벗어날 때, 현학의 과시는 될지언정, 적절성을 확보하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