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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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는 생각보다 과격하지 않다. 무장투쟁을 선동하는 것도 아니고 자본주의를 전복하라는 것도 아니다. “불법체류자를 차별하는 사회, 이런 사람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 퇴직연금제도와 사회보장제도의 기존 성과를 새삼 문제삼는 사회, 언론 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된 사회”에 대해 분노하고, 정치적 참여를 촉구하고 있는 팜플렛 쯤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조국 서울대 교수는 이 얇은 책 뒤에 쓰인 글에서 “투표하라”고 촉구하고 있는데, 그의 성향으로 보아 ‘한나라당’에 투표하라고 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 결국 ‘정권교체’를 위한 젊은층의 투표참여를 말하고 있는 것일 터이다. 따라서, 언론에서 떠들썩하게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의 한국적 버전의 결론은 기껏해야 “우리의 정당한 분노와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꾼다.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의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 바꾸기에 나서자”(조국)라는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의 발기문 수준에 불과하다.

내가 이 책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스테판 에셀이 “돌아가자”라고 말하고 있는 레지스탕스 정신이다.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평의회에서 합의한 이념과 정책방향은 좌우를 넘어서 프랑스 사회가 보편적으로 동의하고 합의하고 있는 규제적 원리로 작동한다. 한 사회가 정치적 지향을 막론하고 합의할 수 있는 사회적 지향이 존재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믿는다. 미국의 ‘애국주의’가 그러할 것이고, 일본의 천황제가 그러할 것이다. 물론, 애국주의나 천황제가 바람직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에셀이 말하고 있는 레지스탕스 정신은 프랑스 혁명의 가치인 자유 평등 박애라는 세계사적인 보편이념을 현실화한 것이라는 점에서 미국과 일본의 그것과 차원을 달리한다. 문제는 한 사회 내부의 정치적 분열과 이념적 혼란 속에서 누구나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의 이념이 존재하고 그것이 규제적 원리로 작동할 때, 그것은 최소한의 공공적 영역을 확보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도대체 무엇에 대해, 무엇에 근거하여 분노하는가. 바로 레지스탕스 정신에 반하는 것들에 분노하는 것이다. 보편적 이념을 거스르는 현실에 대해 분노하는 것이다. 그럼 한국사회에 대해서는 무엇에 대해 분노해야 할까. 우리 내부에 사회적으로 합의가능한 보편적 이념은 존재하는가. 유시민이 말하는 대로 헌법?(<후불제 민주주의>) 바로 그 헌법정신은 조갑제도 말하고 있다. 두 사람의 헌법 해석은 전혀(!) 다르다. 국보법 폐지를 둘러싼 논란도 결국 헌법적 가치에 비춰 그게 부합하는가, 아닌가하는 논란이기도 하다. ‘종북 좌파’의 타도를 외치는 조갑제의 헌법에는 유시민과 달리 헌법이 내장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보편적 원리가 없다. 이것은 에셀이 말하고 있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정신’이 이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힘을 합쳐서 투쟁해서 쟁취해낸 가치이기 때문이라는 사실과 관련될 것이다. 프랑스 국민 모두가 몸과 마음을 바쳐 투쟁해서 얻어낸 고귀한 가치이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이념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헌법이 몇몇 소수의 정치엘리트의 작품이라는 역사적 사실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아놀드 하우저가 독일의 교양소설을 말하면서 미성년의 주인공이 이런저런 방황을 거치면서 사회적 이념에 동의하고 순응하는 과정을 다룬 소설이라고 지적한 대목이 있다. 교양(bildung)의 사회적 자아가 보편적 이념을 내면화하는 과정인 것이다. 서구 사회에서 이같은 보편적 이념이 존재했음에 비해 우리의 근대는 그러한 이념이 부재했다. 유교도 반공주의도 민주주의도 그렇지 못했다. 언제나 우리의 근대는 부정하고 극복되어야할 것이지 수용되고 내면화할 것은 아니었다. 한국의 문학평론가들이 그동안 말해왔던 ‘애비 죽이기’는 이런 맥락에서 거론되었을 것이다. 이제 ‘부친 살해’에서 ‘애비 찾기’로 전환되었다고는 하나, 도무지 ‘애비’의 모습은 어디서도 보이질 않는다. 그러니, 조국 교수도 이 책 뒷날개에 쓰인 신영복, 홍세화의 ‘추천사’도 방향을 상실한 채 그저 분노하고 참여하라는 막연한 ‘선동질’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한나라당에 투표하지 말고 민주당이나 진보정당에 투표하라는 얘기인데, 그것이 젊은층에게 ‘보편적 가치의 실현’이라고 과연 설득할 수 있을 것인가. (이명박 대통령도 투표로 당선되었다. 그러니, 투표만으로 세상이 바뀔 수 있는 것일까.) 스테판 에셀의 이 작은 책이 부럽게 느껴지는 까닭은 바로 우리 사회가 ‘레지스탕스 정신’같은 게 없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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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 2011-07-04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쉴러의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편지>에 "그대의 세기와 더불어 살되 시대의 피조물은 되지 말라. 그대의 동시대인들을 위해 일하되, 그들이 찬양하는 일이 아니라 그들이 필요로 하는 일을 행하라. 그들의 죄를 함께 하지 않되, 고귀한 체념으로 그들의 형벌은 나누어 지고, 그들이 없이 지내지도 못하면서 잘 감당하지도 못하는 질곡 아래 자유의지로 몸을 굽히라."(안인희 역)라는 구절이 있는데, 모름지기 사회적 자아의 '형성'이란 바로 이러한 내재적 초월의 수련과정이기도 하지 않은가 합니다.

모든사이 2011-07-04 13:31   좋아요 0 | URL
'내재적 초월'이라... 어려운 말이기도 하군요. 쉴러와 괴테의 세기는 그래도 바이마르 공화국의 이념이 있었으니 합의가능한 보편적 이념이 있었다고 봐야겠지요. 괴테가 <빌헬름 마이스터>에서 이르게 된 지점이 거기이고, 하우저가 말하는 것도 그런 맥락이기도 하지요. 의견 감사합니다.

모든사이 2011-07-04 14:51   좋아요 0 | URL
요즘 다른 소설들과 함께 읽고 있는 책이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어제의 세계>인데요. 님이 말씀하신 '파시즘의 대중심리'에 절망한 독일(권) 엘리트의 자살과 유언이라는 점에서 독일 엘리트주의(=독일 고전주의?)의 심리적 귀결을 보는 듯 하더군요. 말씀 감사합니다.

트레바리 2011-07-04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이고..써놓고 쑥스러워 지웠던 댓글에 어떻게 답글 달아주시니 당황스럽습니다..^^;; 그럼 망명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책 리뷰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