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써니’가 500만 관객을 넘어 상반기 최대 흥행작이 되었다고 한다. 내가 이 영화를 본 것은 경기도 신도시의 아파트 단지 한가운데에 있는 극장이었는데, 과연, 흥행작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말 9시 20분 상영이었는데도 객석이 모두 매진되었다. 옆 자리에 앉은 중년 부부와 아이들은 낄낄 대면서 영화를 보았고, 가끔 눈물을 찔끔거렸다. 남편은 부인에게 휴지를 건네 눈물을 닦게 했고 부인은 눈물을 훔치면서 코를 팽 풀기도 했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 저마다 낄낄대고 깔...깔대며 눈물 콧물을 흘리는 영화. 영화평론가들의 미학적 평가와는 별개로 이 영화가 남녀노소를 이렇게 불러 모은 것을 보면, 대중의 가장 예민한 성감대를 건드린 것만은 분명하다.
이 영화는 두루 알려져 있다시피 80년대 여고생들의 학창시절을 다루고 있다. 삐쭉삐쭉 솟아난 머리의 신디 로퍼가 부르는 “여자애들은 그저 즐거움만을 바랄 뿐이야”(girl just wanna have fun)가 여학교에 울려 퍼지고, 디제이 박스에서는 리처드 샌더스의 멜랑콜리한 음악(‘reality’)이 나온다. 나이키로 상징되는 당시의 브랜드 열풍, 전투경찰과 시위대가 대치한 거리에 나붙은 ‘록키4’ 포스터에서 실베스터 스탠론이 촌스러운 표정으로 전방을 노려보고 있다. 무엇보다 그 시절의 우리 곁에는 우정을 나눌 따스한 친구들이 있었다. 너도 나도 대입에 목매달지 않았고, 매일 저녁 학원에 가지 않아도 되었던 시대. 극장에 몰려든 중년의 부부들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 잠시 그 시절의 추억에 젖어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앞으로만 흐르는 시간을 거역한다는 의미에서 ‘자발적 퇴영’의 경험이다.
누구에게나 ‘순금(純金)의 기억’은 있을 것이다. 그리스의 서사시적 시대가 인류의 유년기였던 것처럼, 개별적 존재인 우리의 유년기 역시 루카치가 말한 대로, “별이 빛나는 하늘을 보고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시대”였다. 모두의 가슴 속에는 순수한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었으며, 다가올 미래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충만했다. 하지만 그 찰나의 행복은 잠시였을 뿐, 세상에 내던진 우리는 영화에서처럼, 이번 달 실적에 전전긍긍해야 하는 보험설계사가 되어, 시부모와 아이들에 시달리는 주부가 되어 살아가야 한다. ‘먹고사니즘’이라는 이 이데올로기의 영향력은 막강한 것이어서 그 어떤 저항도 불가능하다. 우리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글라데시인이 아니라, “부자되세요”가 새해 덕담이 되고 있는 시대의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미나(유호정 분)와 그녀의 딸은 사뭇 대조적이다. 미나가 딸 나이였을 때 그녀는 전남 벌교에서 올라온 순진한 여학생이었지만, 딸은 용돈을 위해 아빠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사랑해요, 아빠”라고 말할 줄 아는 여자애다. 세상의 섭리가 시장논리임을 아는 딸은 “사랑해요”라는 말을 팔아 용돈벌이를 하는 것이다. ‘순금의 기억’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아직 ‘시장화하지 않은 내면’일 것이다. 당시의 한국 사회가 군사독재 시기이면서도 시장화되지 않은 ‘잉여의 영역’이 남아 있었던 것처럼, 우리의 내면에도 시장화하지 않은 순진성의 영역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 눈물 콧물 흘렸던 중년 부부의 눈물은 유년기에 대한 그리움이 불러낸 것이면서도, 지금 여기서의 삶에 대한 절망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이 영화에는 병원의 환자들이 텔레비전의 막장드라마에 열광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랑하는 두 연인이 “알고 보니 남매였다”라는 황당무계한 드라마다. 영화속의 환자들처럼, 막장드라마임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기꺼이 속아 넘어간다. 순정이 남아 있지 않음을 잘 알면서도 영화속에서는 순정이 존재하기를 기대한다. 어차피, 순정함을 소비하면서 잠시 눈물을 흘리고 추억에 젖으면 그만인 것, 내일이면 다시 출근하여 거래처 사람을 만나고 상사에게 굽신 거려야함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부모세대가 저질렀던 학창시절의 ‘일탈’을 아름답게 포장하지만, 바로 그 부모들은 자식들의 일탈은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옆 자리의 중년 부부가 영화가 끝난 뒤, “영화 끝났다, 빨랑 집에 가서 씻고 자야 내일 학교도 가고 학원도 가지”라고 말할 때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순금의 기억’은 어차피 영화 속에나 있는 법, 우리는 극장에서 과거로의 여행이라는 퇴행성 질환을 잠시 앓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