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6
유디트 헤르만 지음, 이용숙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시몬느 보봐르가 쓴 <이별의 의식>은 병든 사르트르가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던 그녀의 에세이다. 지금은 절판이 되어 구할 수가 없는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보봐르가 사르트르의 시체 곁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이다. 의사는 사르트르의 살이 썩어 들어가니(이를 회저(壞疽)라고 하는데, 최승호의 시집 <회저의 밤>에서 제목으로 쓰인 바 있다.) 시체와 접촉을 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보봐르는 사르트르의 시체에 모포 한 장을 덮고 그 곁에 누워 평생의 반려였던 사내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다. 사랑했던, 그리고 바람기 때문에 무척이나 속을 썩이기도 했던 연인을 떠나보내는 보봐르 식의 ‘이별의 의식’인 셈이다. 사르트르는 보봐르와 함께 살면서 젊은 여자를 연인으로 두기도 했고, 보봐르 역시 사르트르와 부부로 지내면서도 미국인 사내와 열정적인 연애를 하기도 했으니, 두 사람은 참으로 기이하고도 끈질기게 부부관계를 유지한 셈이다. 김현이 ‘모포 한 장의 사랑’이라는 에세이 소재로도 써먹은 이 장면은 이 책을 읽은 지 20여년이 지났음에도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 <알리스>는 바로 그런 보봐르의 에세이를 상기시킨다. 자신이 사랑했던, 혹은 아주 특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남자 다섯 명을 하나 둘씩 떠나보내는 사십대 중반 여자의 이야기이다. 이별 이후 여자가 겪는 외로움이 아니라, 이별하는 과정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 그리움과 상실감, 허무와 고독, 그리고 남은 삶에 대한 의지에 관한 이야기다. 이별과정의 내면을 담백하게 보여주는 꽤 괜찮은 소설이다. 알리스 주변의 남자들은 실연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죽어서 사라져간다. 마흔 중반이라는 나이는 ‘이별하는 과정’에 어울리는 연령대일 것이다. 오랫동안 사랑을 나누었던 사람이 암으로 쓰러져 죽을 수 있는 나이이며, 존경했던 10년~20년 위의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 죽을 수도 있다. 소설가 유디트 헤르만의 문체는 페이소스를 짙게 깔고 있다거나 감정을 표나게 드러내지 않는다. 담담한 견디기라고 해야할 마음의 상태를 이 여자 소설가는 대단히 세밀하고 단단한 문체로 실어나른다. 사람들과의 이별의 과정은 이런 식의 비유적인 풍경묘사로 나타난다.

“가로등은 맥없이 스러져 갔고, 간이매점과 광고지가 부착된 기둥은 공중으로 날아갔고, 주변의 모든 것들이 삐걱거리고 치익거리고 부스럭거리면서 노글노글해지고 얇아졌으며 한줌 먼지로 변해 사라져버렸다. 시청 종탑의 윤곽은 멀리서 흐물흐물해져 푸른 하늘에 녹아들어갔다. 낡은 종탑 시계는 다른 모든 것에 섞여 들어가면서도 한동안 하늘에 걸려 있다가 사라져 버렸다.”

옛 연인 미햐는 병으로 죽었고, 알리스는 그의 아내와 아이 곁에서 죽기 직전의 며칠을 함께 보낸다. 25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70대 노인 콘라트도 열병으로 죽어가고, 알리스는 그의 남은 아내와 함께 마지막 나날을 함께 보낸다. 리하르트도 그렇게 죽어갔고, 그녀는 마르가리테와 장례식 준비를 한다. 그녀가 태어나기 전에 자살한 삼촌 말테의 흔적을 찾기 위해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그의 게이 짝을 찾아 죽음의 흔적들을 좇기도 한다. 그녀의 마지막 남은 연인 라이몬트 역시 죽었다.  모두들 죽었는데도 알리스는 그들이 곁에 있음을 느낀다. 사람은 가도 흔적은 남고, 그 흔적을 안고 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짙푸르게 남아 있는 것이다. 이별 이후에도 삶은 계속된다.

“알리스는 라이몬트를 날마다 보았다. 매일, 알리스는 라이몬트를 어디에서나 보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라이몬트가 가지고 있었던 형상과 존재 형태가 그렇게 다양했단 말인가. 그는 세상 누구일 수도 있었다. 그는 중앙역 에스컬레이터 위에 서 있었고, 역의 높은 회랑을 떠다니듯 걸어갔고, 가벼운 여행 가방을 손에 들고 옆모습을 보이며 걷기도 했다. 여행자이지만 서두를 필요가 없는 사람 같았다. 알리스는 누군가를 옆으로 밀치며 급하게 그 뒤를 따라가면서 라이몬트가 에스컬레이터를 벗어나 출구 쪽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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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 2011-06-26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글을 보니, 저는 왠지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리너즈>의 "죽은 자들"에 나오는 마지막 장면의 묘사가 떠오르네요...

"한사람 한사람, 그들은 모두 그림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이를 먹어 음울하게 빛바래고 시드는 것보다는 수난의 충만한 영광 속에 과감하게 저승으로 건너가는 것이 더 나으리라. 그는 자기 곁에 누운 여자가 그녀에게 나는 살고 싶지 않다고 얘기하던 연인의 눈동자를 가슴속에 그토록 오랜 세월 꼭 품고 있었던 것을 생각했다. ..... 그의 영혼은 무수한 죽은 자들이 사는 영역에 접근한 것이었다. 그는 그들의 불안정하고 깜박이는 존재를 의식했지만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 자신의 정체성은 만져지지 않는 어떤 잿빛의 세계 속으로 스러져가고 있었다. 견고한 이 세계 자체가, 이 죽은 자들이 한때 키웠고 세웠고 또 그 안에서 살았던 그곳이 해체되고 또 줄어들고 있었다." (김정환&성은애 역)

모든사이 2011-06-26 22:37   좋아요 0 | URL
네, 더블리너스의 하고 많은 판 중에서 저와 똑같은 번역본을 읽으셨다니 더욱 반갑네요. 님 글의 댓글은 더블리너스에 대해 예전에 쓴 리뷰로 대신하겠습니다. 혹시 읽으셨을지 모르겠으나, 이 블로그 뒤편에 있습니다.(http://blog.aladin.co.kr/myforties/4206267)

트레바리 2011-06-27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더블리너스 리뷰 잘 읽었습니다. 정말 풍부하신 독해력 감탄합니다. 창비본은 좋다고 생각하는데, 위에서 '수난의 충만한 영광'에 나온 '수난'이 원문에는 passion으로 되어있어, '열정'으로도 옮길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의문도 있습니다. "상대역들"이란 단편은 해방 전에 양주동이 "샐러리맨"으로 번역한 적도 있습니다.

모든사이 2011-06-27 14:3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양주동과 조이스라, 조이스가 더 나이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참 안어울리는 조합처럼 느껴지는군요. 모더니즘과 향가 연구의 차이 때문일까요? ㅎㅎ 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