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나온 <창작과 비평> 봄 호를 읽다. 시 코너에 맨 처음 나오는 김선우의 시를 보다. 도정일은 시를 읽고 이해하는 일은 짧은 문장 속에 담긴 의미를 궁구하고, 진지하게 사색하는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비교적 짧은 분량의 시는 거기에 담긴 의미를 캐내기에는 너무나 적은 정보를 담고 있다. 독자는 그 짧은 정보를 실마리 삼아 시의 의미를 풀어내야 한다. 정보의 조각들을 이리 꿰고 저리 기워 하나의 세계를 다시 만들어내야만 한다. 그것은 독서를 위한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지 않는 요즘의 나같은 사람에게는 딱 어울리는 일이다. 길을 가면서, 버스를 타고 가면서, 담배를 피우면서,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서 그 정보의 조각들을 이어 붙이고 꿰매는 ‘사유의 노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점점 텅 비어가는 정신을 메꾸기 위해 김선우 시를 따라가면서 해보는 사유의 도상연습.  

"비가 내린다 오늘은(죽은 門이 피를 흘리듯)/유적에 남겨진 문장을 읽는 달빛/빗줄기는 말랐구나, 아 나는 빗소리처럼 비만하구나//오래 기다려도 차는 오지 않고/핏대를 세운 발뒤꿈치를 들며 비오는 오늘은 박물관에 갔네/세상 어디나 있는 식기들(한참 들여다보면 우스꽝스러워지는,/더 한참 들여다보면 슬픔이 자글거리는)/총기들 갑옷들 각종 서류들 인장들//목 없는 마케팅에 입혀진 화려한 씰크 드레스/아아 추워라, 우리의 고향은 정거장/오늘의 권력자에게 이 질긴 드레스를 보여주고 싶네/당신이 죽은 아주 오랜 후에도 우향우 좌향좌 기립해 있을/당신의 드레스/서성이고 서성이며 서성이는 드레스/(당신이나 나나 참)//비오는 날의 박물관 100년 간격으로 늘어선 방들/서성이다 지쳐 빗소리에 열쇠를 꽂는다/(정거장엔 빈 무덤들/100년의 정거장에서 다음 정거장으로 떠도는/텅비어 질겨진 드레스들 앞에서/윙크하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누군가)//이봐, 나 본 적 있지?/빗줄기는 저렇게 가는데/젠장, 빗소리를 왜 이리 질긴 거야./두 생애나 밀린 급료를 어디서 받으라고!//박물관 지붕으로 쏟아지는 마른 빗줄기/헤치며 헤드라이트 불빛이 잠깐 멈추었다 떠난다/투명한 두터운 슬픈 몸이 지나간다."
- 김선우, 비오는 드레스 히치하이커, 창작과 비평 

이 시의 내러티브를 재구성하면 이렇다. 1) 비오는 날 박물관에 갔다. 2) 박물관에서 식기, 갑옷, 총칼 등을 들여다 보았다. 3) 마네킹에 입혀진 실크 드레스도 봤다. 4) 박물관에는 100년 단위로 방이 도열해 있는데, 거기도 드레스들이 있다. 5) 박물관을 나오니 지붕으로 빗줄기가 내리고,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친다. 6) 박물관 밖에서 (드레스를 본 탓인지) 투명하고 슬픈 몸이 지나간다. 이렇게 찢어발기고 나면 앙상한 내러티브만 남게 되지만, 나로서는 이렇게 내러티브적 재구성을 해야 온전히 내 식대로의 독법이 가능해진다. 
 

1연. 김선우(시인 자신이 곧 화자일 터이니)는 비오는 날 집을 나서 박물관으로 향한다. 빗물은 건물 벽을 타고 흐르는데, 그 모습은 마치 문에 피가 흐르는 듯한 풍경이다. 문은, 죽은 문이니 오래된 문이거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 있는 문일 터이다. 비에 젖은 풍경을 두고, 낯설기 그지없는 이미지, 곧 문에 흐르는 생피를 상상해내는 능력, 그게 시인의 발상법일 것이다. 그런 돌출적인 이미지로 인해 비는 섬뜩하고 선명한 이미지를 얻게 된다. 둘째 줄의 ‘유적에 남겨진 문장을 읽는 달빛’, 이 시구는 원래 달빛이 유적을 비추고 있다, 라는 평범한 진술을 비틀어 표현한 것이리라. 주체와 객체를 도치해 달빛이 문장을 읽고 있다, 라고 진술한 것. 빗줄기는 말랐는데, 빗소리는 비만하다? 다시 말해, 빗줄기는 가늘게 내리고 있으나 내리는 소리를 요란하다, 라는 의미일 것이다. 소리가 크다, 라는 것을 ‘비만’이라는 가시적인 이미지로 바꾸어 내기.

2연. 김선우는 정거장에 서 있다. ‘핏대를 세운 발꿈치’로 보건대, 기다려도 차가 오지 않아 내심 화가 치밀었던 모양이다. 박물관에 가서는 식기들과 총칼, 갑옷 따위를 들여다 본다. 식기를 들여다보는 일은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다. 과연 그럴 것이다. 박물관의 식기들은, 그 언젠가 누군가 거기에 밥을 담아 식구들과 더불어 먹었을 것인데, 그런 내력을 가진 식기가 원래의 주인과 제자리였던 밥상을 잃어버리고, 박물관에 와서 조명을 받으며 전시돼 있는 일. 이런 박물관의 ‘식기’들이 제 나름 지녔을 기구한 내력을 생각해보는 일은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일이다. (이런 대목은 20세기 초 고향 북극에서 미국으로 ‘잡혀온’ 에스키모 미닉이 미국 전역을 돌며 구경거리가 되었다가 죽은 뒤 뼈마저도 자연사박물관에 ‘전시’되었던 비극적 내력을 생각나게 한다.)

3연. 마네킹에 실크 드레스가 입혀져 있다. 여기서 드레스는 정거장의 이미지와 겹친다. 정거장은 ‘정주’의 이미지가 아니라 ‘노마드’의 이미지이다. 정거장은 다만 거기 있을 뿐, 사람들은 그곳에서 아주 잠시 머물고 떠날 뿐이다. 박물관의 드레스도 마찬가지. 원래의 주인은 사라지고 없으나 드레스는 마네킹에 입혀져 전시돼 있다. 주인이 권력자에서 마네킹으로, 그리고 그 마네킹은 또다른 마네킹으로 바뀔 것이다. 그러니, 어디로 갈지 몰라 “서성이는” 게 드레스다. 주인과 마네킹은 사라질 것이나 드레스는 남는 것이자 “질긴” 것이다. 이쯤되면, 쉼보르스카의 시, ‘박물관’을 떠올릴 수 있겠다. 김선우의 질김과 쉼보르스카의 “고집이 센”의 의미와 이미지는 아주 닮아 있다. 그러면, 김선우의 박물관과 드레스에 대한 발상은 쉼보르스카에게서 훔쳐온 것인가.

“접시들은 있지만, 식욕은 없어요/결혼반지는 있지만, 이심전심은 없어요/최소한 삼백년 전부터//부채가 있어요-홍안은 어디 있나요?/검들이 있어요-노여움은 어디 있나요?/어둑어둑해질 무렵엔 루트는 현조차 튕기지 않아요.//영원의 결핍 때문에/만 개의 낡은 물건이 모였어요/진열장 위에 콧수염을 매달고/이끼 낀 문지기가 낮잠을 쿨쿨 자고 있어요./금속, 점토, 새의 깃털이 조용히 시간한테 이기고 있어요./고대 이집트의 해죽거리던 처녀의 머리핀만이 킬킬대고 있어요.//왕관은 머리보다 오래 남았어요./손바닥은 장갑에게 졌어요./오른쪽 구두는 발에게 이겼어요.//나에 관한 한, 나는 살아 있어요, 믿어 주세요./내 드레스와의 경주는 계속되고 있어요./그것이 얼마나 고집이 센지!/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살아남고 싶겠어요!”(박물관, 쉼보르스카)

4연. 그런데, 정거장=드레스의 이미지는 박물관 전체의 이미지로 확장된다. 박물관은 원래의 주인, 원래의 자리를 잃어버린 물건들이 모인 곳. 거기 가는 사람들도 잠시 머무는 곳일 뿐이다. 100년의 연대기별로 구분되어 있는 정거장 같은 박물관. 사람들은 거기서 엄지를 치켜세우고 윙크하며 사진을 찍는다. 5연. 이것은 드레스의 독백이다. 의인화된 드레스는, 자신의 두 생애에 걸친 ‘전시노동’의 급료를 받지도 못한 채, 자신의 질긴 목숨과 유사하게 질기게 내리는 빗소리를 탓한다. 어쩌면, 그것은 박물관의 방문객 김선우가 빗소리에 대해 퍼붓는 신경증적인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앞의 3연에서 김선우가 드레스에 대해 털어놓는 고백, "당신이나 나나 참"이라는 진술과 연결된다. 자기투영인 셈이다.

6연. 그러니, 차라리 의인화된 드레스라기 보다는 김선우라고 보는 것이 낫겠다. 박물관을 나오니 여전히 밖은 밤이고(헤드라이트 불빛), 지붕에는 빗줄기가 내리고, “투명한 두터운 슬픈 몸”이 지나간다. 두말할 나위없이 이것은 박물관에서 “텅비어 질겨진 드레스”를 본 탓에 떠올린 환영이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텅 비어 질겨진, 오로지 거죽(옷)으로만 남아 투명하고도, 슬프게 떠다니는 모습으로 겹쳐 보이기도 할 것이다. 비오는 날에 정거장에 옹송거리며 서 있거나 지나는 사람들은 모두, 화사해 보이나 그 안은 텅비어 질겨진 드레스처럼(강시처럼?) 떠다니며 히치하이킹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정주하지 못한 채 떠도는 저 투명하고 두터운 슬픈 몸들은, 죄다 박물관의 드레스와 유사한 운명이거나 히치하이커들이 아닐 것인가. 우리는 모두 유목민 인 것처럼, 붙박이가 아닌 삶들은 모두 히치하이커가 아닐 것인가.

이 시는 좋은 시인가, 그도 아니라면 읽을 만한 시인가? 별로 읽을 만한 시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정서적 울림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읽을 때 주는 리듬감도 느껴지질 않다. 시로서 기억촉진적이지 않다는 얘기다. 나로서는, 이미지를 제시하는 시인의 역량, 낯설고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연결하고, 충돌시키면서 만들어내는 시적 효과를 고려할 때 평균 점수는 줄 수 있을 것 같다. 위에서 써내려간 잡설들은 이 시를 의미론적으로 재구성한, 약간의 정신노동을 수반하는 작업일 따름이다. 잘못 읽은 것인가? 아무려나, 소설이든 시이든 작가와 독자 사이에 이뤄지는 커뮤니케이션은 (내적인) 일 대 다 커뮤니케이션이고, 그런 상황에서는 독자의 일방적 독해만이 남게 마련이다. 발신자인 작가가 항변해 봤자 소용없다. 불교경전의 첫 대목처럼 ‘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 이렇게 들었다)일 따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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