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판된 <사랑의 묘약>(문예출판사)과 최근 나온 <엘제아씨>(문학과 지성사) 두 책 모두에 실린 슈니츨러의 단편 <내가 만났던 중국인>은 총살 당하기 직전에도 책을 읽고 있는 중국인이 등장한다. 이 중국인은 의화단의 난에 연루된 인물로 3시간 뒤면 총살당할 처지다. 독일군 장교인 주인공은 그를 기이하게 바라본다. 도대체 죽음을 앞두고 천연덕스럽게, 그리고 태평스럽게 책이나 읽고 있다니, 저런 사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 그에게 왜 책을 읽고 있냐고 묻자 세상일이란 어찌될지 모르니 그저 책이나 보는 수밖에 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 중국인에게 감동한 독일군 장교는 상관에게 부탁해 그가 석방되도록 한다. 세상일이란 알 수 없는 법, 어디서 흘러오고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법 아니겠는가.
말기암 환자 김현의 병상을 오고 갔던 이인성은 ‘죽음 앞에서 낙타다리 씹기’를 회고하고 있는데, 그런 죽음 직전의 ‘몽상’보다, 책을 읽을 수 있는 평정심을 얻을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할 것이다. 과연, 세상일이란 알 수 없으며, 내 뜻대로 되지도 않고 느닷없이 축복과 벼락이 동시에 들이 닥치기도 하는 것이다. 마음의 망명지로서 책은 차라리 안전하고 오히려 쾌적하다. 거기가 환멸의 거처이며 패배의 귀착지일지언정, 마음을 고문할 주리와 형틀은 없으리니. 새된 목소리로 반경 100미터 이내에서 지저귀는 소리들은 제껴두고, 그저 책이나 보자. 세상일이란 어찌될지 알 수 없는 법이니, 알려는 시도도 참으로 부질없는 짓이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