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토요일 아침 부스스한 눈으로 현관문을 열고 신문을 들어보니 리영희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해왔으니 부고기사를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그와 인연은 없지만 아주 오랫동안 그의 글을 읽어왔기 때문에 집안의 먼 친척 한분이 돌아가신 듯한 느낌이었다. 한겨레에 연재되던 칼럼을 꼬박꼬박 챙겨 읽었고, <사회와 사상>에 실린 논문을 밑줄 쳐가며 읽었으니 내 과거의 한 때 그는 내 일상의 어느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2. 한길사에서 나온 <리영희 저작집>을 검색해보니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이후 그의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리영희, 임헌영 두 분이 함께 나눈 <대화>는 물론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내가 처음 읽은 그의 책은 <분단을 넘어서>였던 것 같다. 대학 학보사 책장에 아무렇게나 꽂혀 이던 이 책을 집으로 돌아와 방바닥에 배를 깔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전환시대의 논리>야 그보다 이전에 나온 책이지만, <우상과 이성>을 읽은 뒤에야 펼쳐봤던 듯 싶다. 그 다음에 <역정>, <자유인>으로 넘어갔고, 어느 순간 리영희 선생의 글이 재미없어졌다. 직접 쓴 책은 아니지만 그가 엮은 <중국백서>나 <베트남 전쟁>류의 책들도 읽을만한 부분만 발췌해서 봤던 것 같다.

#3. 그와 그의 책에 대해서 떠오르는 몇 가지 사념들.  

 

그러니까, 오늘 아침 그의 부고기사를 읽은 뒤에 버스를 타고 출근하면서 창밖 풍경을 보며 떠올렸던 기억들이다.  


#4. 버스의 라디오에서 국가인권위원회가 대북 삐라를 살포하라는 '권고'를 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한국전쟁이 터졌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가 읽고 있었다는 에드워드 기번의 영어본 <로마제국쇠망사>. 지방의 어느 소도시에서 당시로서는 희귀한 재능이었을 영어 독해력으로, 두터운 기번의 책을 읽고 있는 젊은 청년의 모습. 전쟁이라는 소식에 마음이 다급해졌을 법한 데, 천년 전에 망한 한 제국의 역사를 탐독하는 모습은 기이한 열정으로 비춰졌다.

#5. 버스가 수색을 지나 모래내를 지난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어디선가 그는 한글본과 영어본, 불어본으로 세 번 읽었다고 고백하는데, 불어본을 본 것은 감옥에서였다. 영어와 중국어, 일어, 프랑스어까지도 능통했으니 빅토르 위고를 읽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리라. 한 에세이에서 그는 장발장의 생애를 읽어가면서 한국의 검사들이 가진 기본적 소양의 부족과 더불어 그다운 결론을 이끌어 낸다. 그것은 바로 자베르 경감이 장발장을 체포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이었는데, “체포영장”이 없어서 못했다는 것. 19세기의 프랑스에서도 영장을 통한 체포와 구속이라는 최소한의 사법적 절차가 지켜졌는데, 20세기 후반의 한국에서는 그조차도 없었다는 것. <레미제라블>을 읽으면서 그가 느꼈던 탄식을 나는 영화 <타인의 삶>을 보면서 느꼈는데, 이 영화는 동독 비밀경찰조차도 ‘영장’이 없어 용의자를 체포하지 못하고, 그들이 남긴 도청과 감시의 기록도 그대로 보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산당 지배에서조차 사법적 절차에 대한 준수와 기록물의 보존이 이뤄졌다는 얘기다.  


#6. 연세대에서 하차.  

 

1991년 1월 연세대 장기원 기념관. 거기서 리영희 선생은 ‘사회주의는 이기적 인간성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인가’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당시 언론은 ‘마르크스주의의 폐기선언’이라고 기사를 썼다. 굴곡진 얼굴로 발표문을 읽다가 가끔 청중을 보던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마르크스주의는 실패했으되, 초기 마르크스주의의 휴머니즘은 여전히 유효하며 앞으로도 보존되어야할 담론이라는 것. 알뛰세가 인식론적 단절이라고 불렀던 전기와 후기의 마르크스 중 전자만이 가치있는 마르크스주의라는 선언이었다. 좁은 공간에는 젊은 열정들이 눈을 초롱초롱 밝히고 있었다. 지금은 연세대 교수가 된 박명림이 그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메를로 퐁티와 사르트르의 결별’을 인용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당신의 선언은 메를로 퐁티의 전향과 무엇이 다르냐는 식의 질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러니까, 한국전쟁을 둘러싼 프랑스 지식인들의 논쟁과 <휴머니즘과 폭력>을 썼을 당시의 메를로 퐁티를 거론했을 것이다. 그의 책들로 봐서는 마르크스주의자라기보다는 이성적 합리주의자 정도로 생각했는데, 마르크스주의의 폐기라니, 언제 그가 마르크시스트였던가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 주 일요일에 가깝게 지내던 서울대 법대를 나온 선배 하나가 리영희 선생의 선언에 충격을 받았다며 소주잔을 기울이던 생각이 난다. 그는 <전환시대의 논리>의 세례를 받은 세대였던 것.  


#7. 환승 버스를 기다리며.  

 

1976년 당산 대지진. 미 국무부가 수집정리한 중국 관련 정보를 모은 <중국 백서>를 편역할 만큼 중국 전문가였던 리영희 선생은 당산 대지진과 그해 일어난 뉴욕의 정전사태를 비교하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인간형을 비교했었다. 당산에서는 약탈과 방화 같은 것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음에 비해 뉴욕은 잠깐 동안의 정전 사태에 가게 유리창이 부서지고 온갖 약탈이 자행되었던 것.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중국이 개혁개방이 된 이후 당산을 다녀온 신경림 선생은 당산에서도 마찬가지로 약탈 사태가 일어났다고 쓰고 있다. 리영희 선생은 중국의 ‘공식정보’에 과도하게 의존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료와 사실에 근거한 그의 글쓰기에도 오점은 있었던 것.

#8. 버스가 독립문 고가를 지난다.  

 

저 건너 시사인이 있던 자리에 출판사 까치가 있었다.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대학시절 정운영 선생의 책을 얻기 위해 이 출판사에 갔었다. 에두아르트 푹스의 <풍속의 역사>. 까치 출판사에서 나온 이 책은 리영희 선생이 일본에 갔다가 발견해서 국내에 번역 소개된 책이다. 일종의 섹스와 그것을 둘러싼 풍속의 변천이라할 이 책은 소재와 달리 유물론적 사관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발터 벤야민은 푹스에 대해서 에세이 하나를 쓰기도 했다. 섹스의 풍속사와 리영희 선생은 어째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지인들은 술과 욕망에 대해 솔직하리만큼 충실했던 분으로 회고한다. 엄격하고 치밀한 글쓰기 저 편에 그런 세계가 존재했다는 것은 차라리 위안이다.  


#9. 버스 왼편으로 보이는 서대문형무소.  

 

열화당에서 나온 <서대문형무소>는 일제 때 세워진 서울 도심 부근의 이 형무소가 이사하던 것을 계기로 사진과 에세이를 묶은 책이다. 리 선생은 1964년 이 감옥에 갇혔던 경험을 이 책의 한 에세이에서 풀어 놓고 있다.  이 책을 보고 나서 개방된 지 얼마 안 된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갔다. 지금은 메이저 언론의 사진기자가 된 친구와 함께 형무소 담벼락에 기대어 사진을 찍고 어두컴컴한 옥사 복도 안으로 햇볕이 비치는 것을 오래도록 쳐다봤다. 내가 찍은 사진은 형편없었으나 친구가 찍은 사진은 전문가답게(?) 매우 훌륭했다. 건축 관련 사진을 리포트로 제출하라는 ‘한국건축사’ 수업에 친구의 사진을 제출해 A+를 받았다.  


#10. 광화문 광장 한가운데에서 남대문 방향을 보면 조선일보 코리아나 호텔이 정면으로 보인다. 광화문 광장의 시야는 저 흉물스러운 빌딩 하나가 망쳐 놓고 있다.  

 

조선일보 남재희-리영희 충돌사건. 당시 조선일보 정치부장과 외신부장 사이에 벌어진 이 싸움은 신경전을 넘어서 물리적 폭력이 동원된 사건인데, 어째 리영희 선생의 <대화>에 나오는 회고와 다른 지인들의 회고는 정반대다. 단순히 간부급 기자들의 충돌만이 아니라,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을 지배하던 두 지적 논객의 충돌이자 서로 다른 사상적 패러다임의 충돌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기이한 것은 이들 서로 다른 두 지성이 지주의 아들이자 천하의 바람둥이 소설가였던 이병주와의 교류와 친밀함에 있어서는 앞서거니 뒤서거니할 정도로 긴밀했다는 점이다. 이병주는 출옥한 뒤 세상물정을 공부한답시고 당시 신문을 샅샅이 뒤져 읽었는데, 그중 조선의 외신면이 탁월하다는 것을 알고 부장인 리영희와 교유를 텄고 둘은 아주 친해졌다. 리영희는 해고 뒤 이병주가 차린 출판사 ‘아폴로’(이 社名은 촌스럽기 그지 없으나 당대의 분위기에서는 아주 지적으로 보였나 보다.)의 외판사원 노릇을 잠시 했다. 남재희 선생은 이병주의 박람강기와 술, 여자에 대한 탐닉을 즐거워했다.(<언론정치 풍속사>, 민음사) 그런데, <지리산>의 이병주는 일급의 소설가라기보다 사실 삼류에 가깝다.

11. 어느새 버스가 회사 앞에 도착했다. 삼가, 내 한 시절의 지적 스승이었던 리영희 선생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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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12-12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토요일은 아니고 월요일이었지 않나요.
-19일까지 통화 불갑니다. 출장이 좀 길어서요.
-예산안 날치기 보니 돌아가고싶은 맘 싹 가시네요.
그런다고 뭐 뾰족한 수 있는 건 아니고...
-남아공입니다

미국사람 2011-08-20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노이에자이트님의 이영희 선생 글에 붙은 댓글을 보고 여기까지 타고 왔네요.

88년에 미국에 왔지만 이영희 선생책은 대충 다 찾아 읽었는데 박명림과 그런 일이 있었더군요. 남재희와 이병주의 일도 그렇게 연결이 되는군요.

유신 말기에 대학을 다닌 사람중에 이영희 선생을 자신의 거울로 삼은 사람이 꽤 될겁니다. 영어로 하면 role model 이라고 하나요.

요즘 한국소식은 참 우울한데 이 시대에는 이영희가 왜 없을까 생각해 봅니다. 민주화의 이익을 어떤 이상한 사람들이 전부 해먹었다하는 생각은 왜일까요.

이영희 선생 생각에 한마디 해 보았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