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이라는 마니교적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행복이거나 불행, 둘 중 하나다. 사람도 그러해서 선인과 악인으로 구분될 뿐이다. 악한 본성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해도 악할 수밖에 없으며, 선한 본성을 가진 사람은 어떤 비참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결국은 그의 본성이 드러나 사회적 배려와 축복을 받게 마련이다. 주말 동안 디킨즈의 오래된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윤혜준 옮김, 창비)를 읽으며 이 놀랍도록 단순해서 차라리 행복해지는 세계에 젖었다. 불운한 결혼으로 잉태되어 구빈원에서 태어나고 자란, ‘착한 소년’ 올리버와 그를 둘러싼 선인과 악인들의 이야기. 세상은 부유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의 선한의지와 자선과 배려에 의해서, 그리고 심성이 ‘원래’ 착한 사람들에 의해서 구원되리라는 소박한 전언은, 복잡한 이해와 생각을 요구하지 않는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구분되지 않는 이 복잡하고도 난해한 현실을 잊게 만드는 것이다. 크리스마스도 다가오는데, “착하게 살아라”라는 ‘크리스마스 철학’을 설파하는 이 19세기 작가에게 경의를 표해야 마땅하리라.

이런 소박한 철학은 사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지배하는 ‘사상’일 것이다. 불운한 출발, 험난한 역경과 의지로 이뤄낸 극복, 예기치 않은 도움과 구원의 손길,  그제서야 풀리는 오해와 인연, 지옥에 떨어지는 악한, 결국 사랑과 행복에 이르는 선한 사람들, 이런 멜로드라마는 브로드웨이와 피카딜리를 지배하는 삶의 철학 아니던가. 그러니, 이 책을 읽으며 디킨즈는 절대로 우리의 정신을 고문하지 않고, 행복한 결합과 화해로 이끄는 뮤지컬 장르의 문법을 처음으로 세운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미국 중산층과 여피의 철학을 현대적 대중예술로 이끌어 올린 미국식 뮤지컬이, 왜 우리사회에, 그것도 강남 한복판에서 유행하는지를 별로 따져보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런 멜로드라마의 선명한 이분법의 세계는, 소파에 다리를 뻗고 길게 누워 ‘즘생’처럼 퍼져있고 싶은 주말에 딱 어울린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을 뿐이다.


ps 1. <올리버 트위스트>는 하도 많이 나와 어지러울 정도다. 검색해보니 아동용으로 각색된 다이제스트본도 있는 것 같고, 수십 년 전에 나왔던 것을 표지와 활자만 바꿔 다시 펴낸 것도 있는 것 같다. 창비판에는 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이 추천한 ‘최고의 번역본’이라는 레테르가 붙어 있는데, 과연, 그런 평가를 받을 만하다. 19세기 런던 뒷골목의 지저분하고 음습한 분위기는 번역자의 뛰어난 문장 덕에 아주 실감나게 복원돼 있다.


ps 2. 디킨즈 소설을 읽다가 아주 오랜만에 아놀드 하우저를 뒤져 봤다. 기억할 만한 대목이 있어 인용해 둔다. 오늘은 12월 1일. 지금은 사회적 문제의 해결을 국가의 제도적 의지와 사회안전망이 아니라, 개인의 선의지와 자선에 기대어 풀어보려는 빨간색 자선냄비가 등장할 시간인데, 하우저의 디킨즈에 대한 지적은 이 ‘크리스마스 철학’이 은폐하고 있는 지점을 정확하게 가리킨다.  


 

“디킨즈는 처음부터 예술적으로 및 이념적으로 진보적인 문학의 새로운 타입을 대변했다. 호감을 사지 않는 곳에서도 그는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의 사회적 주장이 전혀 마음에 안들 때에도 사람들은 그의 소설에서 재미를 느꼈다. 그의 예술적 관점과 정치적 관점은 서로 분리될 수 있었다. 그는 사회의 여러 죄악, 부자들의 냉혹과 거만, 법의 가혹성과 몰이해성, 어린이에 대한 잔인한 취급, 감옥과 공장과 학교의 비인간적 조건들, 한마디로 모든 제도적 조직체의 속성인 개인적 고려의 결핍에 대해서 불꽃 튀는 어휘로 분노를 터트렸다. 그의 고발은 모든 사람들의 귀를 시끄럽게 울렸고, 사회 전체에 부정의 책임이 있다는 불안한 느낌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채웠다. 하지만 고난의 외침과 실컷 울고 난 다음에 으레 따르기 마련인 만족감을 뭔가 보다 확실한 것으로 인도하지는 못했다. 작가의 사회적 메시지는 정치적으로 결실이 없었으며, 그의 박애주의 역시 예술적으로 매우 고르지 않은 결실을 맺었다. 그것은 인물들의 심리학에 대한 작가의 공감을 깊게 했으나, 동시에 그의 눈초리를 흐리기 만들기 쉬운 하나의 감상주의를 낳았다. 그의 무비판적 인정주의, cheeryblism(막연한 온정주의), 소유계급의 사사로운 선의와 선행이 사회적 결함을 개선할 수 있으리라는 신념은 마지막까지 분석해 본다면 그의 애매한 사회의식에서, 계급들 사이에서의 그의 소시민적인 미결정적 위치에서 기원한 것이었다. .. 그는 과거 부르주아지의 건강하고 비감성적인 이기주의를, 텐느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크리스마스 철학’으로 변질시켰다. “착하고 서로 사랑해라. 가슴의 느낌이 유일한 진짜 기쁨인 것이다. 학문은 학자에게, 자존심은 점잖은 사람들에게, 사치는 부자들에게 맡겨두어라.” 디킨즈는 이 사랑의 복음의 알맹이가 정말 어떤 것인지, 그리고 거기에 약속된 평화가 사회의 약자들에게 얼마나 비싼 희생을 치르게 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현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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