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더글러스의 ‘오염’에 관한 설명은 흥미롭다. 그녀는 “깨끗하지 못한 것은 제자리에 놓여 있지 않은 것”이라 말한다. 쓰레기가 쓰레기장이나 휴지통에 있을 때는 더럽지 않다. 하지만, 쓰레기가 식탁 위에 놓여 있거나 침대 위에 있다면 그것은 더러운 것이 된다. 물론, 그녀의 관심은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을 가르는 분류체계에 있을 것이다. 오염에 대한 그녀의 설명을 좀더 확대하자면 맥락을 떠난 말, 궤도를 이탈한 채 진행되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내게 그것은 많은 경우 ‘자기만의 방’에 갇혀 몰입해 있을 순간에 벌어진다. 몰입은 상황과 조건, 맥락과 역사를 배제한 곳에서 시작된다.

나는 땅에 몸이 닿는 부분이 가장 적을 때 몰입의 강도가 가장 세진다는 터무니없는 속설을 근 20여 년째 믿고 있다. 이런 근거 없는 얘기를 어느 책에서 읽었는 데, 그게 어느 책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것은 시인 천상병이 두꺼운 ‘서양문화사’의 책장을 넘기면서 마산거리를 걸어갔다는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이 대목을 읽었을 때 천상병은 예의 그 속설을 믿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안락한 책상을 떠나 ‘걸어가면서’ 책을 읽었을 것이고, 읽고 난 뒤에도 생생한 기억력으로 르네상스와 빙켈만을 줄줄이 떠들어 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걷는 것보다야 뛰는 게 땅에 닿는 몸의 부위와 시간이 가장 적고 짧겠지만, 인간이 아직 뛰면서 책을 읽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으니 읽으며 걷기가 아직은 최선이다.

<발터 벤야민의 마지막 횡단>(제이 파리니, 솔)을 버스 정류장에 서서,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키들거리며 읽었다. 퇴근 시간의 버스는 복잡하기 마련인데, 내 두 발바닥의 면적만큼 땅에 닿았으므로, 그것은 낮 동안 두 발바닥과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때보다야 훨씬 적게 땅에 닿은 것이므로, 당연 몰입의 강도는 더 세질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벤야민의 전기소설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그의 절친이었던 게르숌 솔렘의 회고로부터 시작된다.  <한 우정의 역사>(게르숌 솔렘, 한길사)에서 그가 보여준 벤야민에 대한 애정과 갑작스런 죽음에 대한 탄식을 기억한다. 그는 내가 결코 좋아하지 않을 시오니스트이긴 하나 벤야민에 대해서만큼은 그의 기억과 기록을 신뢰해도 좋을 것이었다.

그의 기억을 빌어 작가가 묘사하고 있는 벤야민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우유부단함”으로 가득한 인물이다. 가령 그것은 식당에 가서도 몇 번이나 주문을 번복하다가 결국은 처음 주문한 생선을 먹거나, 음식이 왔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이 주문한 음식을 부럽게 쳐다보는 버릇에서 절정을 이룬다. 결국 보다 못해 “좋아, 발터 나랑 음식을 바꾸세. 내 접시를 자네가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상황에선 식사를 못하겠어”하고 음식을 바꾸자마자, 벤야민은 한숨을 쉬며 “내가 주문을 잘 한거야. 그렇지? 자네 음식은 맛이 없군”이라고 말한다. 성질 급한 사람이라면 한대 쥐어박았을 우유부단과 머뭇거림의 극치다.

숄렘은 벤야민이 여자문제에 관해서 우유부단함의 극치를 보였다고 회고한다. 그는 “벤야민은 상대여성이 다른 남자와 살고 있거나 그에게 전혀 매력을 느끼지 않는 경우에만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니, 아샤 라시스에 대한 찌질한 구애의 맥락도 그의 본성에 비춰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지극히 벤야민스럽다. 그 대목에 밑줄을 긋는 데 버스가 흔들리면서 제대로 그어지지 않는다. 이 대목을 읽으며 혼자서 킬킬대는 내 모습을 옆자리의 여학생이 힐끗 봤던 것도 같다. 이런 벤야민이기 때문에 그의 삶에는 어찌할 수 없는 비극성이 간직되어 있었고, 종내에는 국경수비대가 온다는 낭설에 괴로워하다 자살을 했을 것이다. 나치의 예고된 공격으로 불안해진 파리를 빨리 떠나야 하는데도 파리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차마 떠나지 못하고, 빨리 파리를 떠나라고 재촉하면서도 ‘수표’를 보내오지 않는 미국의 호르크하이머를 원망하고 있는 벤야민. 이 자가 가진 구제불능의 우유부단함과 섬약함이 어찌 사랑스럽지 않겠는가. 갑작스럽게 솟아나는 벤야민에 대한 애정, 이것은 혼자만 간직하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퇴근 버스 안에서 이런 대목과 조우하는 순간은 유쾌한 경험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기안의 맥락 안에서의 움직임일 뿐이다. 책과 책속의 인물과 그것이 연쇄적으로 일으키는 읽기의 역사적 맥락은 다른 자리에 놓이게 되면, 애초에 간직한 ‘말끔한 유쾌’를 잃어버리게 마련이다. 유쾌함을 나누고자 하는 욕망은 다른 맥락과 자리에서는 추악한 것이 되거나, 때로는 폭력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책의 맥락과 현실의 맥락을 혼동하고, 아니 때로는 전자가 후자를 구축하는 만용이 벌어지기도 한다. 자기 몰입이 빚어내는 비극이자 몰입이 결과할 것을 망각한 자리에서 벌어지는 추태이기도 하다. 그것은 더글러스가 말한 대로 식탁위에 놓인 쓰레기다. 몰입을 경계할 일, 타자를 배제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심리적 집중은 질병 수준이다.

베르그송은 ‘웃음’에 관한 그의 책에서 웃음이 유발되는 순간은 적절한 기대를 배반하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슬랩스틱 코미디에서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은 멀쩡하게 잘 걸어가던 사람이 휘청거리며 꽈당 넘어질 때 같은 경우다. 정상적인 맥락과 기대를 벗어나 의외의 순간이 연출될 때 웃음이 터진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을 읽을 때 웃음이 가진 폭력성을 떠올렸었다. 푸코의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런 웃음은 정상적 맥락을 단일한 회로로 가진 자들의 폭력적 감정이입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수의 회로가 공존하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자기동일성이 타자에 대해 낳는 폭력적 결과가 웃음인 것이다. 그것이 폭력화되지 않으려면, 몽상의 거처는 자기안의 방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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