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정원의 붉은 열매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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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의 <내 정원의 붉은 열매>(문학동네)를 읽다. 오래 전 <상상>에서 그녀의 데뷔작인 ‘푸르른 틈새’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는다. 스토리가 기억나지 않는다하더라도 어떤 이미지와 인상만은 남을 수 있을 것인데 그조차도 없다. 이건 내 부실한 기억력 탓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소설에 내게 어떤 매혹도 가져다주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그 뒤로 읽은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은 반복적 독서를 허용하지 않을 만큼 내게 재미를 주지 못했다. 그녀의 서술이 주는 단단함과 분석적이고 예민한 관찰이 돋보일 뿐이었다. 이 쓸쓸하고 스산한 늦가을에 어울리는 완미한 소설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몇 개의 단상들.

 1) “아름답고 매혹적인 운명의 모서리” - 어떤 운명에의 예감

 “강아지는 내 품에서 잠들었다. 이미 어둠이 내려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유행가 같은 시, 코끝을 맴도는 향수, 관자놀이를 울리는 웃음소리, 가슴께가 터질 듯 옥죄는 실내용 드레스, 풍성하게 늘어진 들장미 송이와 끝없이 휘돌며 도망치는 넝쿨 가지들 .... 그때 나는 캄캄한 어둠과 혼란스런 상념 속에서 어떤 아름답고 매혹적인 운명의 모서리가 뾰족하게 솟구치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가시면류관처럼 쓰라린 내 미래이기도 하리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어린 아이의 시각으로 예술가가 살지 않는 ‘예술인 마을’에서 벌어진 소소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단편 ‘웬 아이가 보았네’는 이렇게 끝난다. 담담한 서술에 돌연 시간적 비약이 일어나면서 읽는 자의 눈길을 확 잡아챈다. 흑백필름 같은 장면에 갑작스런 컬러가 등장하는 대목이다. 이 단편은 이 마을에 들어온 요리사와 그의 젊고 예쁜 ‘여류시인’ 아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다. 본디 배운 것이 없으나 두뇌가 명석하여 글자를 배우자마자 시인이 되어 버린 요리사의 아내는 마을 사람들의 선망과 질투를 한 몸에 받지만 어느 날 마을에서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급기야는 자신의 남편에게서조차 떠나버린 여자.

이 마지막 진술에서 이제껏 어린아이의 시각을 빌려 숨어 있는 화자는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이미 성인이 된 화자가 어린시절을 회상하고 있음을 표나게 드러낸다. 소설 전반의 내러티브가 잔잔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상당히 돌출적이고 선명한 인상이다. 그것은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저 그런 마을에서 ‘아름답고 매혹적인 운명’을 동경하는 영혼이 마악 눈을 뜬 순간이며, 때로는 그것이 ‘가시면류관’을 쓴 것 같은 고통을 줄지라도 감히 그 운명에로 나아가려는 ‘기투의 의지’가 발동하는 순간이다. 바람인지 무엇인지 모를 욕망 때문에 집을 나가버린 이 여류시인처럼, 화자는 어린 시절 이후의 자신의 삶이 그녀의 운명을 반복할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여류시인의 ‘아름답고 매혹적인 운명’은 위의 인용처럼 이국적 쾌락과 관능적 매혹의 이미지를 흠씬 풍기며 이 마을의 일상을 한층 누추하게 만들어 버린다.

누구에게나 그러한 순간은 존재하지 않을까. 유년기의 어느 한순간, 너무도 생생하고 강렬하게 정신을 사로잡았던 장면 말이다. 채 성숙하지 못하여 혹은, 갑작스런 충격으로 당시에는 그 의미가 잘 파악되지 않았지만, 나중에야 그것이 자신의 운명을 예비했던 순간이었음을 아프게, 때로는 기쁘게 자각하는 경험 말이다. 내게 그것은 쥘리앙 소렐의 최후를 급하게 읽어 내려가던 순간이었을까, 스산한 가을날 빈 들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순간에 들려오던 메마른 기침소리였을까, 버스 밖으로 내다보이던 소도시의 낡은 간판 불빛이었을까, 어느 겨울 추운 새벽녘 신촌 지하철 저 너머로 냉담하게 사라져가던 얼굴을 보았던 순간이었을까. 이 문장을 써내려가는 순간 권여선의 손길은 갑작스런 단절과 비약으로 바삐 움직였으리라.

2. “너 요즘 고민이 뭐니?” - 미망, 혹은 기억의 현전
 

대학시절을 함께 보내고 남자와 여자가 다시 만나 옛 기억을 더듬어 가는 소설 ‘내정원의 붉은 열매’. 이 대화의 과정에서 여자는 자신이 대학시절 세미나 지도를 해주었던 선배와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녀는 “만두 속 즙 터지듯 기억의 물방울이 톡 터졌다”고 말한다. 친구와 선배의 섹스를 목격한 순간 “자고 갈래요”하고 찾아들었던 선배 P의 방. 선배 P는 그녀의 말을 잘못 알아듣고 술만 한잔 하고 가라고 냉담하게 말한다. 그녀는 P가 술을 사러 나간 사이 그 방을 나와 버린다. 그녀와 선배 P는 채 사랑에 이르지도 못한 채 어물어물 관계가 끝나고 마는데, 소설은 이 ‘찌질한’ 첫사랑에 대한 뒤늦은 회고담이다.

“무엇인가 완성되는 순간은 그것을 완전히 잃고, 잃었다는 것마저 완전히 잊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우연이 그 언저리를 헛짚는 순간이다. 택시기사가 보았다시피 한겨울 새벽거리를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는 심야 택시의 묵시록적인 관통 속에서 휙 지나가듯 내 첫사랑은 완성되었다. 그리고 완성된 순간 비스듬히 금이 가버렸다. 하지만 혹시 말이다. 사태는 너무 늦었고 나는 너무 늙었지만 말이다. 만약 산타가 아니라 P형이 그날 밤, 그 비스듬한 화분 방에서 목을 살짝 기울여 내 귀를 버찌 열매처럼 빨갛게 물들이며 이렇게 속삭여 주었다면 어땠을까.
너 요즘 고민이 뭐니? 나는 네가 너무 나를 닮아서 걱정이다.
어쨌든 P형은 첫눈에 나를 알아보았고 마찌꼬바를 마찌꼬바라고 분명이 말할 줄 알았던 내 첫 선배였으니 말이다.”
 

이미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어버렸고 자신도 늙어버렸다. 첫사랑이 완성되었을지도 모를 그 순간을 지금 회고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하지만, 무엇인가 이뤄지기 직전의 그 “버찌 열매처럼” 붉은 마음은 두고두고 회고할 만한 것이 아닐까. “너 요즘 고민이 뭐니?”는 두 사람 사이의 소통의 문을 열어 젖히는 말이다. 이 질문에 대한 그녀의 답변은 봇물 터지듯 이어졌으리라. “나는 네가 너무 나를 닮아서 걱정이다”라는 상호동질성의 확인은 급기야 첫사랑의 완성을 불렀으리라. 미완의 첫사랑이므로 그것은 너무 늙은 지금에도 지속적으로 현전한다. “기억의 물방울”이 툭 터지듯 현전하며 완성의 순간을 기다린다. 잃고 잊었을 때에야 비로소 완성되는 아이러니, 기억과 갑작스런 회상 속에서만 완성되는 ‘붉은 열매’ 같은 첫사랑의 순간들.

3. “그녀는 오지 않고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 믿음의 역설
 

6년의 세월을 엇갈리며 남자를 사랑해온 여자.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실연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서른 다섯 살의 남자. “그때 찬물을 먹었어야 했는데”라고 뒤늦은 한탄을 하는 남자. 하지만, 모든 것은 “괜찮니?, 괜찮네”다. 이제 모든 것은 ‘소소한 과거사’가 되었다. 두 번째 소설 ‘사랑을 믿다’는 서로 다른 실연의 기억들을 공유하고 있는 두 남녀가 기차처럼 긴 술집에서 나누는 대화와 회상이다. “그녀는 오지 않고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 사랑이 보잘 것 없다면 위로도 보잘 것 없어야 마땅하다. 그 보잘 것 없음이 우리를 바꾼다.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 받아들이면 됐다.” 사랑을 믿지 않게 되고, ‘시린 진리’를 깨닫게 되는 나이 서른 다섯. 그들을 맞을 곳은 이제 동네의 ‘단골 술집’ 밖에 없다. 그걸 아는 것도 ‘찬물’ 같은 시린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동네에 단골 술집이 생겼다는 건 기억에 대해서는 한없는 축복이지만 청춘에 대해서는 만종과 같다. 사랑을 믿던 한 시기가 끝났으며, 뒤를 돌아보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지금 서른 다섯이라는 인생의 한낮을 지나고 있다. 태양은 머리 꼭대기에서 이글거리지만 이미 저묾과 어둠을 예비하고 있다. 내 생애의 조도는 여기가 최대치다. 이보다 더 밝은 날은 내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서른 다섯이 인생의 한낮이라는 문장은 시리다. 동네에 단골술집을 만들고 거기 가서 소줏잔을 기울이기에는 아직 이르다. 동네 치킨집이거나 선술집의 쓸쓸하고 퇴락한 공간에 몸을 부리기에는 아직 미련이 남을 것이다. 권여선 소설 속의 이 때 이른 자각의 주인공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는 전언처럼 들린다. 여자는 오지 않고 사내는 사랑을 믿지 않게 되었지만, 소설의 제목은 역설적이게도 ‘사랑을 믿다’이다. 이것은 ‘아직도’ 인가, ‘그래도’인가, ‘이제야’ 인가. 분명한 것은 주인공 사내와 여자 모두 ‘실연’을 당했거나 엇갈려 사랑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 요컨대 그들은 사랑에 실패한 인간들이다. 실패한 자들만이 온전히 믿음을 간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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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11-12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리뷰 잘 봤는데 표제작에서 '친구(현수)와 낙타 형의 행위'는 비역질이 아니죠.
현수는 여자유. 작중 '나'와 같이 늙어 '노파가 될'이란 표현에서나
'콤팩트' '화장을 한' 등의 수식어로 봐서 '비역질'은 형의 오독이우.
그리고...30대 중반의 '읽기'와 40대 초반의 '읽기'가 참 다르군요.
돌이키기에 늦긴 하지만 표제작에서 화자의 태도는 담담하기 이를 데 없던데.

모든사이 2010-11-13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 수정하겠네. 그런데, 40초반이 되면 네 읽기도 달라질 것이니, 그리 타박하지 말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