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86
송기원 지음 / 실천문학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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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송기원의 새 시집 <저녁>(실천문학사)을 읽다. 1947년생이니 그도 벌써 예순이 훌쩍 넘었다. 몇 년 전인가 인도로 가서 도사가 되어 돌아오더니, 이제는 조금 이르다싶을 정도로 ‘죽음’ 타령이다. 바로 이 시집 전체가 죽음의 냄새로 진동할 정도로 죽음에 대한 천착으로 일관돼 있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송장 썩는 냄새가 나질 않는다. 냄새는커녕 죽음의 흔적조차 없는 것 같다. 가볍고 가볍게 죽어 바람이 되어 이 세상을 휘이 떠돌 듯 활강하며 여기저기 싸돌아다닌다. 메우고 성긴 데가 없이 쉽게 죽죽 읽히는 시행들과 어렵지 않은 시어 사이에서 이 늙은 시인은 자신의 죽음에게서 깊은 절망을 걷어내고 초연하고 담담하게 다음 생을 바라본다.

10월 초 교보에서 이 시집을 사면서 나는 ‘감옥’과 ‘여자’와 ‘인도’로 요약되는 그의 한 생애가 이번에는 어떻게 펼쳐져 있을까 조금 궁금했다. 먼저 ‘감옥’. 70년대 유신반대 운동의 앞자리에 선 송기원에게서 ‘투사’의 흔적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지금은 절판이 된 소설집 <월행>에 실린 리얼리즘 소설들도 그러하거니와 무엇보다도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실천문학사)에 실린 시편들도 당시의 민중적 감성을 촉촉하게 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왕년의 역전 앞 건달이 다소 치기어린 감상으로 노래하는 운동권 문학청년의 정서 같은 것이었을 터이다. 가령 표제작인 이런 시. “별빛 하나에도/우리를 빛낼 수는 있다//한방울 눈물에도 우리를 씻을 수는 있다//버려진 정신들을 이끌고,/바람이 되어//한반도에 스민 잠을 흔들 수는 있다//춥고 긴 겨울을 뒤척이는 자여./그대 언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더이상 시를 써서/시를 죽이지 말라.//누군가 엿보며 웃고 있도다./웃고 있도다.”

이 시집의 ‘발문’은 시인 이진행이 썼는데, 그것은 송기원의 두 번째 시집 <마음속 붉은 꽃잎>에 실린 고은의 발문과 더불어 가장 뛰어나고 감동적인 시집의 발문이리라. 뛰어난 발문은 시인의 됨됨이와 그와의 인간적 연대를 날 것으로 드러내며, 시인 자신의 인간됨을 통하여 시가 예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요즘에는 그런 발문을 보기 어려운데, 이번 시집 <저녁>에도 시인 유용주의 감동적인 발문이 실려 있다. 유독 송기원에게서 감동이 있는 발문이 많은 까닭은 그가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의 인간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일 터다. 정치적 올바름의 관점에서라면 필시 문제가 많았을 그의 시와 소설을 내가 오랫동안 읽어온 내력도 그런 것이 아닐까. 내가 읽은 시집 가운데에서 또 하나의 뛰어난 발문을 들자면, 그것은 김영현의 <겨울바다>에 실린 김명인의 발문 <발문으로는 조금 긴 우리들의 자서전>일 것이다.

다음 여자. 그런 송기원에게 ‘여자’에 대한 탐미주의적 집착이 공존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기도 했다. 그는 일찍이 전국의 사창가를 돌아다니며 <송기원의 뒷골목 기행>이라는 르뽀집을 낸 인물이기도 하다. 이 몸으로 쓴 기록(?)은 후일 <마음 속 붉은 꽃잎>에 실린 상당수 시들의 원형이 되었고, 거기서 서러운 창녀들의 생애는 “내 몸뚱아리를 스쳐 지나간/수많은 남자들이/단 한 남자로만 밝아오는/저 환장한 보름달”과 같은 절창으로, 대학로의 연극으로도 만들어진 눈물겹게 아름다운 단편 <늙은 창녀의 노래>로도 쓰여졌다. 민주화 운동의 투사임에도, 어찌할 수 없는 욕정을 간직한 그의 탐미성은 장편소설 <여자에 관한 명상>을 통해 본격적으로 자신의 여자-육체에 대한 탐닉의 욕망을 골똘히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이 소설의 남근주의적 성격을 둘러싼 페미니즘 진영의 문제제기가 생각나기도 한다.

다음 인도. 민주화 투사에서 여자에 대한 탐닉은 이어 갑작스런 노장사상과 인도 몰입으로 급선회 했다.(<인도로 간 예수>) 감옥과 여자와 인도 사이의 이 아득한 거리, 인생의 행정이 이렇듯 극단적으로 오고 가는 삶이란 소설가의 삶이 아니라 시인의 삶일 것이다.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 혹은 삶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전체상을 조망할 수 있는 산문적 인식이 아닌 시적 인식에서만이 급격한 단절과 비약, 극적인 선택이 가능할 것이다. (일찍이 쿤데라가 <생은 다른 곳에>에서 설파한 서정시인의 덕목이 바로 이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송기원의 이런 시적 삶은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인식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듯 하다. ‘사람’에게서 아름다움의 본질을 발견하는(동인문학상을 받은 <아름다운 사람>) 그는, 인간에 대한 탐구, 자신의 삶에 대한 내적 발견을 위해 인도로 떠나게 되는 것이다.(<인도로 간 예수>) 시골장터의 깡패(<너에게 가마, 나에게 오라>)가 감옥과 여자에 대한 탐닉, 그리고 인도를 거쳐 이른 곳은 다름아닌 ‘죽음’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지 않은가.

“여자의 알몸을 처음 대한 스무 살에, 맙소사/깊이 사정을 한 것은 벌써 죽음이었다.//서른에는 아이도 태어나고, 마흔에는 징역도 가면서/참으로 열심히 나는 죽었다./히말라야에 갔던 쉰, 장가계에서 사진 찍은 예순 후로/나는 내가 죽었다는 것마저 잊었다.”(자연사) 그러고 보면, 나는 이 작자의 스무살 청춘부터 죽음에 이르는 예순까지의 삶을 힐끗힐끗, 단속적이지만, 참으로 열심히 읽어온 셈이다. 이미 스무 살 무렵부터 죽음이었으니 죽음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다르지 않다. “꽃들이 한꺼번에 벙글어지는 봄날/너와 나도 한꺼번에 벙글어진다면/삶과 죽음은 어차피 둘이 아니다.”(교감, 부분) 봄날, 그 환장할 꽃몸살에 취했을 때 우리는 벌써 죽은 것이니, 그 까닭은 한꺼번에 벙글어지는 생의 절정을 맛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생의 절정에서 보면 이쪽은 죽음이고, 저쪽은 삶이다. 정상은 오르막의 끝이지만, 내리막의 시작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러니 그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일 밖에. 그것은 때로 “메줏덩이 안팎에, 무모하게/푸른 곰팡이로 살아온 걸 네가 알까”(곰팡이, 부분)에서처럼 ‘곰팡이’(곰팡이는 죽은 것도 산것도 아니다)이거나, “무서리가 내린 초겨울 아침에, 두엄에서 내가/모락모락 하얀 김으로 피어오른다고 여기자”(두엄, 부분)는 ‘두엄’(두엄은 썩는 것, 생명을 다하며 죽어가는 와중이다.)이거나, “물방울로 현현할 수도 있을 거다/.../저 가볍게 허공을 떠도는 것들의 현현”(물방울, 부분)에서처럼 ‘물방울’(물방울은 죽은 것이로되 살아 허공을 떠다닌다.)이거나, “밤하늘에 내가/푸른 불빛으로 박혀 있다.//죽는다는 것도, 애오라지/푸른 불빛으로 박혀 있는 순간일 뿐”(붓, 부분)에서처럼 ‘밤하늘의 별’(별은 죽은 것이거나 산 것이다)이다.

여자에 대한 명상에서 ‘진리’를 찾았던 송기원이니 “일찍이 네가 흘린 애액을 핥으며/넉넉히 배가 부르고//일찍이 네가 흘린 애액에 몸을 적시며/흠뻑 잠이 들었거니//여기에서 더 이상 무슨 공부를 만나랴.”(애액)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에게서 '여자'는 곧 '인도'로 가는 길이었던 것. 왜냐하면, “이렇게 몸이 없이 사방을 돌아보면, 아아/몸 이외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몸이 없는 곳에는 그 어떤 것도 없구나.”(몸)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걸 두고 남성적 욕망의 근원에 자리한, 구원과 쾌락의 동시적 제공자로서 우주적 창녀 운운하지 말자. 그것은 지독한 외로움의 산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가 네 살을 만지고/네가 내 살을 만진다/ .... 외로움이란 그런 것이다///내가 내 살을 만지고/네가 네 살을 만진다/.... 외로움이란 그런 것이다.”(살) 상대의 ‘살’에 대한 이끌림도, ‘몸’에 대한 욕망도 외로움이요, 자신의 몸에 대한 ‘발견’도 외로움이다. 아니, 너와 내가 몸 속에서 외로움으로 이미 하나이다.

삶은 살을 맞대고 있어도 외로운 것이니, 이승의 삶은 생의 무게로 무겁다. “바람이 불면, 문득 무게가 그리워지네/나도 한때는 확실한 무게를 지니고/바람이 부는 언덕에서/한껏 부푼 부피도 느끼며/군청색 셔츠를 펄럭였지/마치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그렇게/누군가의 안에서 언제까지라도/지워지지 않을 것처럼”(무게) 죽음은 이 무게를 벗어나는 것, 삶의 중력이 부과하는 무게감의 긴장에서 벗어나 가벼워지는 것. 스무살 청춘부터 예순까지 이미 죽어있던 송기원에게서 죽음은 더없이 가볍고 발랄한 것이다. 히말라야 설산에 가서 발견한 것은 죽음 이후에야 그가 삶의 무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래 묵은 때처럼, 나는/지워지질 않는구나//이를 테면 나는 한번도/땅을 밟은 적이 없다.//만질 수 없는 허공속에서/둥둥 떠다녔으리라.//히말리야 설산에서는/죽은 사람들이 눈사태를 일으키고//나는 비로소 밟는다/풍장이 되어 날아가는 땅을”, 땅) 삶의 형이상학에 몰두한 청춘에게 애시당초 현실적 근거(땅)는 희박했던 것, 죽어 날아가야 온전히 자유다. ‘맨발’로 세상을 박박기며 살아온 시인이 변산반도 곰소 앞바다의 숭어떼를 만나러 가는 길, 그게 “내가/내 죽음의/절차를 견디는 일”(임종)이다. 

해발 4천 킬로가 넘는 히말라야 산길에서
맨발을 만났다.
어림잡아 일흔이 넘는 노구와
또 어림잡아 십 킬로는 넘는 곡식푸대 걸망을
할머니의 맨발이 버팅기면서
경사 가파른 바윗길을 잘도 걷고 있었다.
내 운동화가 맨발을 뒤따르는데,
갑자기 맨발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변산반도 곰소 앞바다 숭어떼가 나타났다.
때마침 멸치잡이 배를 뒤따라온 숭어떼가
철퍼덕, 철퍼덕, 힘차게 꼬리치는 소리까지 들렸다.
맨발은 이미 세상 밖으로 떠나갔으리라.
맨발은 한번도 본적이 없는 곰소 앞바다에 가서
숭어 떼에 섞여 힘차게 유영하고 있으리라.
어느 순간 나도 세상 밖으로 떠나가고, 맨발과 함께
숭어 떼가 되어 해발 4천킬로의 바윗길을
철퍼덕, 철퍼덕, 힘차게 꼬리쳤다. 
 -  맨발
 

이런 죽음은 슬프지 않다. 시집 전체가 죽음을 노래하고 있음에도 송장 냄새가 나지 않는 까닭이다. 삶과 죽음 사이를 활달하게 유영하며,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폭넓은 긍정의 지평 위에 올려 놓는 것, 그건 몇 번 죽어본 자만이 할 수 있는 달관이리라. 감옥에서 죽고, 여자에 죽고, 갠지스 강물위에서 죽어 봤지 않은가. 
 

드디어 죽었구나. 
 

멀리 상갓집 등불에
내 모습이
어른대고 있다. 
 

굿바이.
 

씨익 웃으며
내 모습에
손을 흔든다
- 굿바이
 

사는 게 심심하고 쓸쓸하여 송기원 시집이나 읽었는데, 다 읽고 나니 역시 마찬가지. 그만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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