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2
찰스 디킨스 지음, 이인규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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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나오는 소설들은 잘 읽지 않는다. 굵직한 서사의 맛도 묘사의 치밀함도 느껴지지 않고 왜소하고 자잘한 이야기들만 늘어놓고 있다는 인상이다. 이게 프레드릭 제임슨이 말하는 ‘자연의 소멸’이어서 인지도 모르겠다. 자본주의의 전일적 지배가 무의식의 영역에까지 이른 후기 자본주의에서 ‘근대의 서사시’(프랑코 모레티)인 소설은 그저 쇄말적인 소재에나 매달리는 영락한 예술형식이 된 모양이다. 소설은 자본주의의 활력과 전근대의 낭만이 공존하던 시대를 다룰 때 가장 빛나는 예술이 된다. 서구의 19세기가 그렇고 한국의 70년대가 그렇다. 최인호, 황석영, 윤흥길, 김원일, 서정인 등 이른바 70년대 작가로 불리는 소설가들이 그 시대에 가장 좋은 소설들을 펴낸 것도 이런 사정이다. 공장굴뚝으로 대변되는 산업화의 활기가 존재하면서도 노동자의 설움과 비애가 흘러나오고, 소박한 농촌 정서가 살아 있으면서도 이농현상이 극심했던 시기가 바로 70년대다. 역사적 변동기의 활력이야말로 소설에 생기를 불어넣는 힘일 것이다.

소설이 읽기 싫어질 때, 육중한 서사의 힘을 느끼고 싶을 때면 나는 플로베르, 발자크, 제인 오스틴, 스탕달을 읽는다. 이들의 고전은 결코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다 읽고 난 뒤의 뿌듯함과 충만감도 여전하다. 최근 소설들이 보여주는 형식주의적 ‘장난’이나 모더니즘 소설이 가진 뒤틀림이 없이 가장 정통적인 방법으로 소설의 진경을 보여준다. 내 보수적 독서관습도 이런 19세기 작가들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들 소설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새롭게 등장하는 자본주의적 질서에 저항하고 순응하면서 야심만만하게 성공에 도전하다가 좌절한다. 이들이 패배 후 돌아가는 곳은 그래도 남아 있는 순정하고 때 묻지 않은 공간, 인간성의 가장 깊은 곳이다. 거기는 사랑이거나 신뢰, 인간적 연대가 살아 있는 곳이다. 책읽기가 어수선해지고 소설의 본령이 그리울 때 펼쳐드는 작가들의 목록에 한사람 더 추가해야겠다. 그 이름은 찰스 디킨스다.

이틀 동안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이인규 옮김, 민음사)를 푹 빠져 읽었다. 디킨스 소설이야 어릴 때 몇 권을 읽었지만 이 소설은 읽지 않았었다. 우리 집에 있던 문학전집에도 이 소설이 있었지만, 그 왜 있잖은가,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 책 말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울고 웃었던 기억이 언제인지 모르겠다. 이 나이에 소설 따위 보면서 눈물 찔끔거리는 것은 주책스러운 일이나 나는 기꺼이 눈물 몇 방울을 바쳐줬다. 아마 디킨스 소설의 애독자들은 이미 그의 소설을 읽는 재미를 알고 있었을 텐데, 뒤늦게나마 이 사람의 글 솜씨를 제대로 알게 된 것이 여간 다행스러운 것이 아니다. 사는 게 재미가 없고 무감하다고 느껴질 때 펴들 수 있는 책이 한권 늘었으니 말이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요즘의 시각으로는 ‘막장드라마’처럼 보인다. 주인공 핍과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인연은 얽히고설켜 “알고 보니 내가 니 애비였다”는 식의 우연이 남발된다. 그럼에도 그게 크게 거슬리지 않는 까닭은 각 인물들을 보여주는 디킨스의 묘사가 손에 잡힐 듯 생생하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번역 소설’ 가운데 사람들의 위선과 이중성을 이토록 흥미롭고 유쾌하게 풍자하고 있는 것도 아주 드물다. 특히, ‘조연급’들에 대한 묘사는 아주 사실적으로 재현된 시대극의 인물을 보는 듯한 인상이다. 핍의 매부인 선한 대장장이 조, 그의 아내이자 핍의 누나인 풍채 좋고 성격 괄괄한 조 가저리 부인, 시골 소읍의 위선적 인물인 펌블추크와 선량한 윕슬, 런던 변호사 사무실의 사원 웨믹 등의 인물들이 그러하다. 그들이 등장하는 대목은 정말이지, 디킨스가 왜 대가인지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흥미로운 사람은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인 ‘웨믹’이다. 그는 사무실이 있는 해머스미스와 주거지인 월워스를 오고 가는데, 사무실에서의 그는 냉정하고 차갑게 사무를 처리하고 철저하게 돈을 계산하는 인물인 반면, 자신의 집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착한 아들이자 인간미 넘치는 친구다. “(런던의 사무실로) 가는 동안 웨믹은 차츰차츰 메마르고 딱딱해져 갔으며, 그의 입은 다시 꽉 다물어져서 우체통 구멍처럼 되어 갔다. 그러다가 마침내 우리가 그의 근무처에 도착하여 그가 상의의 목깃에서 열쇠를 꺼낼 순간이 되었을 때는, 그는 월워스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마치 그의 성과 도개교와 정자와 호수와 분수와 노인장 등이 ‘귀청 때리는 놈’의 마지막 발사와 함께 모조리 하늘로 날아가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1권, p.384)

그는 자신의 사적인 영역을 런던의 차가운 자본주의적 질서로부터 분리시킬 줄 아는 인물이다. 위선적이고 이중적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직은 식민화되지 않은 안온하고 따스한 공간을 유지하고 그것을 자신의 근원으로 삼을 줄 안다는 얘기다. 확대하자면 그것은 디킨스가 보여주는 당대 영국 사회에 대한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런던과 시골 소읍, 변호사 사무실과 대장간, 착하고 선한 그의 매부와 런던의 속악한 인물들 사이에서 그는 천하고 남루한 하층민과 그들의 삶에 더 곡진한 애정을 보내고 있다. 가령, 도제인 핍을 런던에 데려가면서 돈을 주려는 변호사 제거스에 대해 대장장이 조가 보여주는 태도는 하층계급으로서의 자존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소설에서 이들 계급의 모습은 자신이 속한 계급과 삶에 대한 자존과 위엄으로 도드라진다.

주인공 핍이 ‘신사’가 될 수 있도록 후원했던 익명의 인물은 늪지대로 도망왔쳐 왔던 죄수 프로비스였다. 핍은 공포에 질려 굶주린 그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줬고, 그것은 그에게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위안이 된다. 그는 천한 자신이 신사를 남몰래 키우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유형지의 험악한 삶을 견뎌내고 큰 돈을 벌었다. 그의 행위는 영국 사회에 대한 르상티망에서 시작된 것일 수도 있지만, 디킨스는 그것이 굶주림에 빠진 자에게 어린아이가 보여준 ‘사람과 사람 사이의 호의’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평생 복수를 꿈꾸며 차갑고 냉정한 세월을 보낸 미스 해비셤이나 그의 양녀인 에스텔러도 종국에는 그들의 내부에 지울 수 없는 인간애의 흔적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디킨스는 “사람 잡는 덫을 설치해 놓고 그것을 지켜보는 것과 같은” 초기 자본주의 시기의 런던을 버티게 한 것이 바로 이런 인간성의 연대임을 말하고 있다. 이 소설의 조와 비니는 삶에 대한 태도와 타인에게 대한 깊은 애정과 신뢰를 통해 우리의 영혼이 어떻게 고결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책을 통해 그런 영혼을 지닌 자들과 만나는 것은 책읽기가 가져다 줄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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