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의 <옥희의 영화>를 보다. 조선일보 뒤편에 있는 조그만 극장 스폰지하우스는 퇴근 이후 홀로 영화를 보기에 아주 적절한 공간이다. 홍상수의 영화라서 그런지(?) 좌석은 반쯤도 차지 않았다. 팔걸이에 턱을 괴고 앉아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위선과 위악에 키들거리면서, 그 위선과 위악이 내 안에도 겹겹이 쌓여 있음을 확인하면서 봤다. 80분 동안 오랜만에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를 몸소 체험하고 나서 든 생각은 ‘삶으로서의 텍스트’라는 말이었다. 3장으로 구성된 영화는 마지막 ‘옥희의 영화’에서 그녀의 삶으로 이뤄진 두 개의 텍스트를 병치시켜 보여준다. 그녀가 만나고 연애한 젊은 남자와 나이든 남자와의 짧은 아차산행 산책. 몇 년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두 개의 사건은 그녀의 삶에서 동일한 것의 반복이면서 변주이기도 하다. 반복인 까닭은 연애하는 남자와 동일한 코스의 산책을 했다는 것이고, 변주인 것은 그때그때의 대사와 행위, 그녀가 느낀 순간의 감정이었다.
그녀가 보여주는 두 개의 텍스트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만나게 되지만 다른 두 주인공들인 젊은 남자와 나이든 남자는 동일한 장소에서 서로 조우하지 않는다. 홍상수의 많은 영화가 그렇듯이 남녀가 벌이는 사소하고도 진지한 해프닝과 돌연 격렬해지는 주인공들의 감정적 굴곡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학교에 무슨 약 탔나봐. 요새 다들 나 좋다고 난리다, 난리”라고 발랄하게 내뱉는 옥희. 이 영화는 ‘약’에 취한 사내들이 젊은 영화학도 옥희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연애담이다. 옥희는 그런 두 남자와의 연애를 ‘영화’로 텍스트화하고, 자신의 삶에서 무엇이 반복이고 무엇이 변주인가를 나직하게 들려준다. 약에 취한 사내들이 편재해 있는 세상에서 그녀는 기꺼이 ‘약먹은 사내’들에게로 몸을 내던진다. 그러니 옥희의 ‘영화’는 반복과 사소한 변주일 수밖에 없다. 그녀의 텍스트가 별다른 서사적 차이를 보여주지 않는 이유다. 약먹은 사내들의 애정공세에 기꺼이 기투하는 옥희의 운명이 만들어낸 유사-텍스트인 셈이다.
정혜윤의 <런던을 속삭여줄게>(푸른숲)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삶으로서의 텍스트가 아니라 그녀의 독서편력으로 이뤄진 텍스트와 그에 관한 그녀의 나직한 독백이다. 시인은 시를 쓰지만 때로 시를 온몸으로 살아가듯이, 누군가는 삶으로서 자신이 보여줄 ‘텍스트’를 만들고, 누군가는 자신의 독서편력을 ‘텍스트’로 만든다. 그래서 이 책은 런던에 관한 여행안내서가 아니라, 런던행을 빙자한 그녀의 독서일기이자 책에서 책으로 이어진 그녀의 몽상기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구체적인 공간으로서의 영국 런던이 아니라 그녀의 독서목록과 그 책들의 귀한 구절들과 거기서 그녀가 느꼈던 사념들을 따라가며 책장을 넘겼다. 고백하자면, 그것은 질투와 시샘이었다. (이 나이에, 이건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그녀가 보여주는 편력의 내력과 넓이가 질투가 났고, 잘 쓰여진 문장과 그 문장들이 실어 나르는 축축한 감성들에 시샘이 났다. 요컨대, 그녀는 ‘가짜’가 아니다.
유종호 선생은 어느 글에선가 ‘제자리에 놓인 말의 아름다움’에 대해 쓴 적이 있다. (그게 유종호 선생이 인용하고 있는 미국 신비평가 클린스 브룩스의 말인지, 다른 누군가의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부실한 기억, 그리고 그걸 굳이 찾지 않는 불성실이 문제다. 아마 저자 정혜윤이라면 이렇게 쓰지 않았으리라.) 나는 정혜윤의 책을 읽으면서 이 말을 약간 비틀어 ‘제자리에 놓인 인용의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맴돌았다. 그것은 순전히 추후의 ‘인용’을 염두에 둔 극히 실용주의적인 독서의 산물이 아니다. 그녀는 텍스트와 내밀하게 교유하며 그 텍스트를 기억의 갈피에 꼭꼭 접어 두고 적절히 그것을 끄집어낸다. 아카데믹한 훈련을 받은 ‘인위적 독서가’들은 대영박물관을 두고 존 키츠와 쉼보르스카, 마르크스, 헤로도투스, 길가메쉬 서사시를 나란히 놓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자연사 박물관에서 <거미여인의 키스>와 <황금가지>, <마담 보바리>, <인간등정의 발자취>와 릴케, D.H. 로렌스를 동시에 떠올리지 못한다.
책을 읽어주는 일을 직업으로 한 여자가 등장하는 소설이 있다. 책 제목은 밝히지 말자. 다만 레몽 장의 <책읽어주는 여자>는 아니다. 그녀의 일은 ‘사장’이 책에 쓰인 교양을 필요로 할 때, 혹은 사람을 만날 때 그에 관한 적절한 책을 생각해 내고 그 책의 내용을 전달해주는 것이다. 책을 읽는 일을 세상에서 가장 즐거워하며, 책을 읽는 행위가 ‘돈벌이’의 수단도 되지 않을까 라는 가상한 상상의 산물이다. 그러나, 정혜윤은 그런 보상을 바라지 않는 무상(無償)의 독서가다. 기실 독서가 주는 쾌락 외에 다른 것을 전제로 한 책읽기는 가짜들의 독서다. 이 기준에 비춰 나는 대부분의 경우 실용적 필요에 이끌려 책을 읽었으니 분명 ‘가짜’의 반열에 들 것이다. 더구나 그녀는 책읽기를 필수적으로 요구하지도 않는 직업이니(내가 아는 대개의 피디들은 책이 아니라 술에 탐닉하더라.) 그녀가 보여주는 무상의 책읽기는 온전히 ‘순정한 의미에서의 독서’다. 우리나라에 이런 순정한 독서가, 참으로 흔치 않다.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서였던가, 한겨레21 쯤 되는 잡지에서였던가. 저자의 책읽기를 보여주는 몇편의 글을 읽었던 듯한데, 온전히 이 여자의 책을 읽은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영국여행을 앞두고 이 책을 건네준 사람 또한 무상의 쾌락을 아는 사람이었는데, 눈밝은 자들은 자기류의 사람에게 눈을 반짝이게 마련인 모양이다. 저자는 한때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팔렸을 문학전집인 ‘삼성출판사 세계문학전집’이거나 ‘을유문화사판 세계문학전집’을 첫째 권부터 차곡차곡 읽어 내려간 적이 있나 보다. 확인할 길이 없으니 편력으로 그리 짐작할 수밖에 없다. 나야 스탕달을 읽고 몇권 건너 뛰어 세익스피어를 읽다 말고, 에드가 알란 포우에 빠졌다가 모비딕을 반쯤 읽다가 세르반테스에 낄낄대다 제 풀에 지쳐 무협지로 건너갔으니 이건 질투가 아니라 기질의 문제일 것인가. 그런데, 반가운 것은 세상에는 비록 소수나마 이런 전업독서가(?)가 참으로 많다는 사실이다. 누추한 일상을 벗어나려는 욕망을 가진 누구에게나 그런 욕망은 직접적으로, 혹은 변형된 채로 존재한다. 물론 전업은 생계를 위한 시간 외의 시간을 온전히 바친다는 의미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책의 경중을 잴 줄 아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과 칸트의 <판단력 비판>이 이문열의 소설과 <해리포터>와 동일한 반열에 놓일 수는 없다. 그럴 때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침대에 누워 읽다가 소설에 감명해 다시 정장을 하고 책상에 정좌한 채 책을 읽었다는 러시아 비평가의 ‘예의’를 생각하게 된다. <자본>을 소설책 읽듯 읽어치우는 자들은 마르크스가 애용한 대영박물관에서 아동노동에 관한 노동감독관의 보고서를 읽거나 연상해내지 못한다. 정혜윤이 가진 독서가로서의 장점은 이런 ‘기우뚱한 균형감각’이다. 그녀의 책읽기에 일단의 신뢰를 보내는 이유다. 바흐의 파르티타의 존재를 가르쳐준 시인 김갑수는 ‘삶이 괴로워서 음악을 듣는다’고 청승을 떨었다. 나는 도대체 왜 책을 읽는가. 정혜윤의 책읽기를 훔쳐보면서도 그랬다. 왜 책을 읽는가. 그것 역시 이 지상의 삶이 괴로워서 그러한 것이 아닐까. 일상과는 다른 회로, 다른 자전축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 불러낸 것, 기꺼이 그 속으로 망명하고자 했던, 잠깐의 허깨비일지라도, 우리는 결국 '바다로 향해 날아간 나비'처럼 그렇게 책에 머리를 콕 박고 망명을 꿈꾸는 것이 아닐 것인가.
By homely gift and hindered Words
The human heart is told
Of Nothing —
"Nothing" is the force
That renovates the World —
- Emily Dikin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