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마오쩌둥 - 나는 중국의 유토피아를 꿈꾼다 ㅣ 인문고전 깊이읽기 4
신봉수 지음 / 한길사 / 2010년 7월
평점 :
품절
마오쩌둥의 삶과 사상에 대해 내가 읽은 것은 조나선 스펜서가 쓴 <무질서의 지배자, 마오쩌둥>(푸른숲)이었다. 스펜서의 <현대중국을 찾아서>(이산)나 <강희제>(이산)와 같은 책에 비해 그의 마오평전은 상당히 불만스러웠다. 그가 마오를 바라보는 시각은 ‘서구민주주의’를 잣대로 한 것이었다. 서구식 기준으로 볼 때, 마오는 끔찍한 독재자이자 우상숭배와 같은 전근대적 행태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같은 대참사를 불러일으킨 인물이기도 하다. 스펜서의 마오에 대한 시각은 대장정을 끝낸 1935년 전후로 크게 엇갈린다. 대장정 시기까지 마오는 민중의 지도자였지만, 준이 회의(1935)로 군사지휘권을 획득한 이후 ‘독재자’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스펜서는 대약진운동과 문혁과 같은 대재앙은 이미 그때부터 예고되었다고 본다.
스펜서의 시각은 마오에 대한 서구의 ‘표준적 이해’ 방식인 듯 하다. 그들로서는 한 개인에 대한 열광적인 숭배나 수 천만 명이 굶어죽은 대약진운동 같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현상’일 뿐이다. 그 시각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각을 고수할 때 과거의 중국도, 현재의 중국도 제대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미국에서 끈질기게 ‘중국붕괴론’ 같은 것이 살아남는 이유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중국붕괴론을 한반도까지 연장하면 ‘북한붕괴론’이 된다. 이해가 불가할 때 그들은 전면적 부정으로 나아가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시각과 상관없이 중국은 승승장구하고, 북한은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마오쩌둥, 나는 중국의 유토피아를 꿈꾼다>(신봉수 지음, 한길사)가 내심 반가웠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짐작컨대 외국의 사상가나 인물을 한국인의 시각에서 쓴 책들은 많지 않다. 한길사의 인물평전 시리즈도 독일의 평전시리즈(한길 로로로)를 번역한 것이었고, <닥터노먼 베쑨>으로 유명한 실천문학사의 평전시리즈(역사인물찾기)도 번역서였다. ‘인문고전 깊이읽기’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이 한길사의 인물 평전시리즈는 맹자, 프로이트, 부르크하르트, 마오쩌둥 등 네 종류가 최근 나란히 출간되었다. 나로서는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에서 벗어난 마오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한국인 학자의 눈으로 꼭꼭 씹어 삼킨 마오의 모습을 말이다.
베이징대에서 마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는 ‘마오의 사상으로 본 중국의 근대성’이라는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다. 일본의 근대화가 서구적 근대화(후쿠자와의 문명개화는 곧 서구화였다.)를 추종하는 길이었다면, 중국은 '중국적 근대화'의 길을 걸었다. 그 핵심에 마오주의가 있다. 저자는 마오의 사상을 인식론, 실천론, 모순론, 계급론, 민족해방론, 인민주의, 유토피아주의, 중국적 독자성, 근대와 탈근대라는 9가지 키워드로 정리한다. 흥미로운 것은 마오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이같은 담론들이 바로 중국적 근대와 사건들을 이해할 수 있는 ‘경로’를 이룬다는 점이다. 마오의 담론은 당대의 사건들이 일어나게 된 맥락과 논리를 설명해준다. 담론의, 담론에 의한 중국 근대라고나 할까
하나의 담론, 그것도 한 지도자의 담론은 국가운영의 원리이면서 인민들의 삶을 좌우하는 핵심기제가 된다. 저자가 서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퀸틴 스키너의 “정치사상은 정치제도를 결정한다”는 말은 마오와 중국의 경우에 그럴 듯하게 들어 맞는다. 그게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마오의 사상이 경험 속에서 길어 올려진 실천적 담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도의 추상적 담론에서 출발하지 않고 경험적 현실과 내부적 실천을 통해서 만들어진 담론이기 때문에 현실과의 상호작용이 그만큼 긴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때로 이 경험주의는 불가능한 현실을 창출하려는 정치적 욕망으로 인해 재앙을 빚기도 했다. ‘경험’은 ‘이론’과의 긴장속에서 스스로를 벼리고 풍성하게 만드는 법일텐데, 마오는 때로 과도한 경험주의로, 때로 과도한 추상으로 흔들거린다.
먼저 마오의 인식론. 그가 쓴(썼다는) ‘변증법적 유물론’은 스탈린이 정식화한(속류화한?) 변유를 거의 그대로 옮겨 놓았다. 물질의 의식에 대한 선차성, 사물의 인식가능성, 변화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 등 과거 소비에트 변유 교과서에서 반복되었던 주장이 그대로 노출돼 있다. 마오가 다른 점이 있다면 ‘인식의 주체성’을 유달리 강조했다는 점이다. 이는 뒤이은 실천론, 모순론 등에서 재차 강조되며 마오주의, 곧 중국적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적 특징을 이루게 된다.
그 다음 실천론. 마오는 “인식은 실천을 통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식은 수준에 따라 감성적 인식과 이성적 인식으로 구분되는데, 감성적 인식은 객관세계에 대한 감각적 인식을, 이성적 인식은 객관세계의 법칙성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마오는 여기서 실천에 대한 강조로 나아간다. 그는 행위 주체의 실천을 강조하면서 객관세계의 조건은 인간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다는 과감한 주장을 펼친다. “인민대중의 자발적인 의지만 있다면 역사발전의 법칙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 객관세계의 조건과 한계를 인간의 의지로 넘어설 수 있다는 ‘만용’에서 마오사상과 중국 근대의 비극은 시작된다. 중국과 북한에서 유독 도드라지는 것은 바로 이런 ‘주의주의’(voluntarism)다. 북한의 주체사상은 주의주의의 극단적 형태일 것이다.
당시 소련은 생산력 발전이라는 물질적 조건의 개선에 힘을 기울였지만 중국은 마오의 실천론에 입각해 그와 다른 발전경로를 추구했다. 마오의 주의주의는 “특수한 상황에서 생산관계, 이론, 상부구조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때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주장은 정통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이탈일 것이다. 마오가 중국적 마르크스주의를 열었다면 아마도 이같은 마오적 편향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니, 저자에 의하면 편향이라기 보다 중국 전통사상(가령 공자)이라는 또다른 마오사상의 뿌리 때문일지도 모른다. 마오는 공자가 인식주체의 능동성을 강조한다고 보고, 이것이 기계적 유물론보다 우월하다고 지적한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11번째 테제의 마오식 변형 ;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객관세계의 규칙성을 이해하고 세계를 해석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규칙을 인식함으로써 세계를 능동적으로 개조하는 데 있다.”(실천론)
저자에 따르면 모순론이야말로 마오사상의 독창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미 중국의 전통사상에는 음양오행설과 같은 모순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의 전통들이 존재했다. 마오는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과 같은 변증법적 논리학의 기초에서부터 시작하여 모순의 보편성과 절대성에 대한 인식으로 발전한다. 그는 모순을 주요모순과 부차모순으로 구분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이론적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당대 중국혁명의 전략과 전술로 확장된다. 반식민지인 중국의 경우 제국주의의 침략이 시작되면 제국과 식민지간의 모순이 주요모순이 되고, 내부의 계급모순은 부차모순이 된다. 또는 제국주의가 중국내 봉건계급, 자산계급과 결탁하여 인민대중을 탄압할 경우 주요 모순은 계급모순이 된다.
중국 현대사는 모순론으로 잘 이해된다. 중국공산당이 1, 2차 국공합작에 참여했던 이유는 주요모순이 제국 대 식민지간의 모순이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가 물러가자 이제 내부의 계급모순이 주요모순이 되어 국공내전에 돌입한다. 중국 공산당이 최종적 승리를 구가한 이후에도 주요 모순은 계급모순으로 계속되는데, 잔존한 봉건세력 및 내부 자산계급과의 투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마오의 시각으로 보자면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은 바로 제국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계급모순을 둘러싼 투쟁인 셈이다.
마오는 마르크스주의의 기본계급인 산업노동자를 혁명의 중심세력이라 보지 않았다. 그는 젊은 시절 자신의 고향 호남성에 가서 작성했던 ‘호남농민 보고서’에서부터 이런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유학파 중국 마르크시스트들이 교조적으로 산업노동자의 우위와 농민계급의 한계를 지적했지만 마오의 ‘경험주의’로 보건대 혁명의 주체는 농민이었다. (마오는 특히 거주지 없이 떠돌던 유민을 가장 혁명적인 세력으로 꼽는데, 여기에 비밀 폭력조직인 삼합회, 청방 등이 들어가 있는 건 참 아이러니하다.) 농민계급의 혁명적 성격을 본 마오의 시각은 당시 중국사회의 발전 정도를 볼 때 타당한 것이었다. 남미의 무장 반군들이 마오주의라고 불리는 것은 그들의 이론이 마오주의여서가 아니라 농촌에 근거한 농민게릴라라는 특유의 투쟁형태 때문이었으리라.
마오의 민족해방론은 모순론과 병행하여 진행된다. 그에게 민족과 계급은 주요모순의 시계열적 변화, 곧 민족-계급-민족-계급의 순환에 따라 중요도가 달리 파악된다. “구국이 계몽을 압도했던 시기”(이택후)인, 1921년 공산당 창당이전에는 민족모순이 주요모순이 되는데,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마오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방법론으로 채택한다. 공산당 창당이후에는 계급모순을 주요 모순으로 파악하게 되고, 1937년 중일전쟁의 시작으로 민족모순이 주요모순으로 등극한다. 사회주의 중국 이후에는 계급모순이 다시 마오의 화두가 된다.
그렇다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이후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덩은 마오의 민족모순에 대한 인식이 외국자본에 대한 적대적 인식을 낳았고, 이것이 중국의 발전을 더디게 만들었다고 본다. 그래서 그의 개방정책은 민족모순이라는 틀을 벗어야 가능했다. 하지만, 민족모순의 해소과정은 동시에 계급모순의 심화과정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중국이 빈부격차가 확대되고 새로운 프롤레타리아가 양산되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대외개방적 자본주의(탈민족)는 현재 새로운 형태의 민족주의(대국-화평굴기론?)와 결합하여 중국사회를 모순을 매우 복합적인 양상으로 드러낸다.
마오주의의 또다른 특징으로 꼽히는 것은 인민주의(populism)이다. 그중에서도 농민 중심의 인민주의다. (중국에서 인민주의의 역어는 민수주의(民粹主義)다) 마오는 봉건경제에서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농민 중심의 인민의 의지만 충만하다면 말이다. 마오는 1959년 경제발전에 관한 보고서의 제목을 ‘2년내 영국 추월’이라고 고치면서 사상과 정치교육을 통해 사회주의 단계로 진입할 수 있다는 망상을 풀어놓고 있다. 그 비밀이 바로 인민의 의지다. 때묻지 않은 순수한 힘이자 발전의 원동력인 인민. 그것은 반지성 혹은 반엘리트주의로서 문혁 당시의 홍위병의 난동은 이런 배경하에서 가능했다.
원초적 힘으로서 인민의 의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마오의 인민주의는 ‘파시즘’의 논리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중국 전통사상에서 줄곧 강조되는 민본주의(민심은 천심)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인민은 물과 같으며, 각급 지도자들은 물에서 수영을 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물을 떠나서는 안되며 물에 순응하고 물을 거슬러서는 안된다. 즉, 대중을 질책하면 안되며, 대중은 질책할 수 없는 존재다.” 민주주의는 인민의 지배를 뜻하며, 권력의 원천이 인민에게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인민을 절대화할 때 실상 그것은 반인민주의가 되기 십상이다. 이때의 인민은 지금 여기의 구체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추상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민중은 옳지만, 민중주의는 글쎄올시다?
중국혁명의 독자성. 마오는 한때의 후원자였던 소련과의 긴장속에서 독자적인 중국혁명의 길을 모색한다. 대장정 시기 다른 지도자들이 코민테른의 ‘지시’를 기다리느라 우왕좌왕하는 사이 마오는 '중국적 현실'을 내세우며 자신의 길을 간다. 사회주의 중국 이후에도 흐루시초프와 냉랭한 관계를 유지하면서(특히 1959년 핵잠수함 관련 갈등) 이른바 평화공존 5개항이라는 외교적 원칙을 천명하는데, 이는 1) 주권과 영토의 상호존중 2) 상호불가침 3) 상호내정 불간섭 4) 평등호혜 5) 평화공존 으로 구성된다. 여기에 주권국가에 대한 불가침 원칙을 뜻하는 ‘절대적 주권’ 개념이 추가되면서 마오의 외교독트린이 완성된다. 덩사오핑하의 중국에서도 이 원칙은 여전히 고수되고 있는데, 1) 주권을 침해받는 국가가 이에 동의하고 2) 외국의 간섭을 유엔이 승인하고 3) 물리적 수단 이전에 정치외교적 협상이라는 세가지 조건속에서 수정가능하다. 이라크전이나 북핵문제 등 국제분쟁에 대해서 중국이 취하고 있는 태도 역시 이 맥락에서 이해가능하다.
저자는 마오 사상이 근대적 성격과 탈근대적 성격 모두를 내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마오가 근대적일 수 있는 이유는 서구의 자본주의적 근대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마오가 서구적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자 대안으로서 추구했던 것은 사회주의였다. “마오의 사회주의는 일종의 근대화 이데올로기인 동시에 유럽과 미국의 자본주의 근대화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왕후이의 말은 매우 적확해 보인다. 그는 마오를 ‘반근대적인 근대성’이라 평가하는데, 마오주의는 근대화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 자본주의 근대화 방식에 대한 비판, 곧 “서구적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마오의 대안적 근대성에 대한 추구는 성공적이었을까. 문혁과 같은 사태를 보면 그렇지 않다. 주체의 해방은커녕, 개인숭배와 전근대적 억압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이다. (마오는 문혁이 70%는 성공, 30%는 과오라고 말한다.)
분명 근대성은 하나이면서 여럿이다. 누구의 말대로 ‘복수의 근대성’이 존재할 뿐이다. 서구적 근대를 지향한 일본은 천황제의 발명이라는 일본적 경로를 거친다. 중국은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라는 경로를 밟았다. 우리는? 알다시피 식민지 근대성이라는 매우 불행한 경로를 밟았다. 현대의 중국을 서구적 근대의 시각으로 볼때 스펜서와 같은 이해방식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실상이라기 보다 자기충족적 예견일 수 있다. 마오는 20세기 전반기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를 통한 중국적 사회주의를 열었고, 덩샤오핑은 20세기 후반기 자본주의의 중국화를 통한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도대체, 이 놈의 나라는 자본주의인 것인가, 사회주의인 것인가. 학자들은 ‘중국 특색 사회주의’니 ‘관료적 발전국가’니 하는 평가들을 내놓는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평가기준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중국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데, 현존했던 ‘역사’의 잣대(그것도 서구적 기준의)를 갖고 이리저리 평가하는 것은 정말 몽매한 일이 아닐까. 우리는 과연 중국이라는 이 괴물(‘×’로서의 중국)을 어떻게 평가해야할 것인가.
2009년 다보스 포럼에 나온 중국학자는 “1949년에는 사회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었고, 1979년에는 자본주의만이 중국을 구할 수 있었으나 1989년에는 중국만이 사회주의를 구할 수 있었고, 2009년에는 중국만이 자본주의를 구할 수 있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마오는 공자도, 맹자도, 마르크스도, ‘베이징의 아담스미스’도 아닌 그 모든 것의 복합체로서의 마오였다. 모두가 마오를 한물 간 정치가라고 떠드는 마당에 이런 책을 펴내 나같은 문외한이 읽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저자에게 감사한다. 논리와 실천, 담론과 현실, 리더십과 민중, 이른바 ‘중국적’이라는 것 등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부디 책이 많이 팔려 신봉수 박사 같은 분에게 많은 위안과 보람을 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