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의 경험은 많지 않다. 당연히 외국의 헌책방을 가본 적도 많지 않다. 유럽의 경우는 이광주 선생의 책 같은데서 얼핏 분위기를 보았을 뿐이고, 일본은 유학을 했던 자들이  간다 헌책방 거리(神田 古本街)를 말하는 것을 들었을 뿐이다.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겠지만 근대적 제책의 역사가 짧은 우리로서는 헌책방도 그만큼 부실한 역사를 가졌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그러니, 외국의 헌책방은 우리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구할 터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서재에 고작 1천여 권이 있었다고는 하나, 그 정도 규모는 지금으로 치자면 1만권이 넘는 분량에 해당할 것이다.  


문학사회학의 접근방법은 서적의 유통과 근대적 독자의 탄생이라는 점을 주목한다. 그런 접근은 우리나라에서 식민지 초기의 ‘딱지본 소설’에 와서야 가능하다. 17세기 자본주의와 함께 출발한 서구의 근대적 책의 생산과 유통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문학사회학적 접근방법이 문학과 사회의 상동구조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한국 현대시의 걸작 중 하나인 서정주의 <화사집>이 5백부 한정본으로 출간돼 지인들끼리 나눠 가졌다는 사정을 생각해보면, 근대적 독서계층의 형성 어쩌고 하는 접근은 공허한 얘기다.

외국의 헌책방이 다를 것이라는 지레 짐작은 이런 맥락에서다. 내가 처음으로 찾아간 외국의 헌책방은 영화로도 유명해진 파리의 'Shakespeare & co' 였다. 그 책방 앞으로 센강이 흐르고, 강둑에는 헌책 노점상들이 주욱 늘어서 책을 팔고 있었다. 서점 안에 있는 것보다는 노점 좌판에 놓인 책들이 더 낡아 보였고 종류도 다양해 보였다. 악보만 파는 노점, 소설책만 파는 노점 등, 지금도 이런 지는 모르겠다. 왜 서점의 이름을 ‘세익스피어 앤 코’로 붙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같은 제목의 간판을 나란히 달고 있는 두개의 가게가 인상적이었다.

헌책방 특유의 비좁고 퇴락한 분위기, 정돈되지 않은 채 쌓여 있는 먼지 앉은 책들, 신간과 구간이 뒤섞여 있는 서가. 우리나라처럼 중고삐리들 참고서나 대중잡지 등이 보이지 않는 게 다르다면 다른 모습이었다. 가장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이 서점의 2층 한구석에 때 묻은 담요를 반쯤 덮고 자고 있는 앳된 모습의 여대생이다. 책더미 사이의 좁은 마루 바닥에서 어깨와 배가 훤히 드러난 티셔츠를 입고 허연 목덜미를 드러낸 채 잠에 빠져 있는 여학생. 서가를 오가는 사람들을 아랑곳 하지 않고 단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 10여년 저쪽의 세월임에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무릇 책이 있는 곳이란 비몽사몽을 오가는 사유와 몽상의 공간이 아닐 것인가.

아마도 그날 거기서 산 책은 시공사 디스커버리 총서의 영어본 두어 권, 르네 마그리트 화집 정도일 것이다. 파리를 알지 못하는 나를 거기로 안내한 유학생 부부는 파리가 나의 유별난 취미를 만족시킬 만한 매력이 있다는 것을 그렇게 보여준 것 같았다. 내 옆에 있던 소설가는 고양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탐욕스런 눈으로 서가를 훑었는데, 정작 아무 것도 사질 않았다. 영어 소설을 밥 먹듯 게걸스럽게 읽어치우는 이 소설가의 책탐으로 보자면 국내 출간이 되지 않은 영어본 책들을 살 법도 한데, 그러기에는 지나치리만큼 검약(?)스러웠다. 귀국 비행기에 싣고 갈 캐리어의 무게를 걱정한 탓일까.

지난 7월 다시 파리에 갔을 때 이 곳에 들러 몇 권의 책을 사왔다. 영국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테리 이클턴의 책, 보수적 인문주의자 매튜 아놀드 평전, 20세기 초 파리에 머물던 예술가들에 대한 책,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영문 만화 버전 등. 약속시간이 임박해 좀 더 느긋하게 헌책을 뒤져보지 못한 게 아쉽다. 서점은 10여 년 전과 똑같았으나 달라진 것은 나와 내 일행들이었다. 그때와 달리 이번엔 혼자였던 것. 파리도, 세익스피어앤코도, 센강도 그대로였으나 나를 둘러싼 관계의 구조와 사슬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파리에서 느낀 적막감과 쓸쓸함은 이런 변화에 대한 실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지난해 뉴욕에 갔을 때 들른 곳은 유니언 스퀘어 부근의 스트랜드(Strand) 서점. 벌써 5년째 아놀드 파머사에서 ‘우산’을 그리고 있는 사촌 동생은 제 오빠의 유난스런 취미를 짐작해서인지 자연스럽게 이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이곳이 뉴욕이라서 그랬을까, 책값도 싸고 쌓인 책들의 더미도 많았다. 책을 사면 서점 로고가 새겨진 흰색 천가방을 덤으로 주었다. 사람들은 어느 코너의 책마다 북적댔다. 뉴욕답게 1, 2층으로 된 대형서점이라 그런지 작은 규모의 헌책방이 주는 포근하고 정겨운 아우라는 없었다.

여기서 산 책은 <누바 족의 최후, The Last of NUBA>, 그리고 프리모 레비의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If not now, When> 두 권. 앞엣 것은 레니 리펜슈탈이 찍은 누바족 사진집이고, 뒤엣 것은 레비가 쓴 장편소설이다. 일부러 그러려고 한 것도 아닌데, 공교롭게도 하나는 파시스트 예술가였고 다른 한명은 반파시즘 작가였다. 정치적 열광이자 이념으로서의 파시즘은 사라지고, 파시즘의 미시정치학이 유행하는 시대에 이건 무슨 ‘흘러간 유행가’에 대한 탐닉일까.

리펜슈탈 사진집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수잔 손탁이 쓴 <우울한 열정>에 실린 에세이 때문이었다. 히틀러의 선전영화 감독이기도 한 리펜슈탈은 미학으로 무장한 파시스트였다. 그것도 거칠고 투박한 파시스트가 아니라 세련되고 감각적인 파시즘 미학의 구현자였다. 손탁은 그녀에게서 ‘파시즘’을 괄호치고 ‘미학’에만 주목하는, 그리하여 그녀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열정적 예술가로 평가하려는 반동적 움직임에 심각한 우려를 보낸다.

<누바족의 최후>에서 보이는 것은 인간의 ‘몸’에 대한 리펜슈탈의 열광이다. 문명의 ‘때’가 전혀 묻지 않은 원시적 삶의 방식을 고집하는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벌거벗은, 그러나 매우 단단하게 단련된 신체. 이 사진집에 실린 ‘몸’들은 여성의 그것이 아닌 남성의 신체다. 이것은 리펜슈탈이 만든 베를린 올림픽 다큐멘터리 <올림피아>가 보여주는 신체의 미학과 빼닮았다. <올림피아>의 첫 장면 역시 가장 완전하고 이상적 형태의 ‘몸’을 보여주는 그리스 조각이 아니던가.

 <누바족의 최후> 역시 아프리카 흑인이라는 점만 빼면 신체에 대한 그리스적 이상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파시즘의 재생신화와 관련된다. 윤리적 타락과 속물적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근대를 부정하고(반근대), 인류문명의 시원적 공간으로 돌아가 새로운 문명을 건설(재생)하고자 하는 ‘의지’. 그녀의 사진은 멋지고 훌륭하지만 그렇듯 거기 스민 정치적 상상력은 치명적 위험을 안고 있다. 파시스트로서 살았던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열정적 예술가를 자처하고자 했던 리펜슈탈의 음험한 시도는 손탁에 의해 여지없이 폭로된다. 스트랜드 서점 서가에 꽂힌 <누바족의 최후>는 모두 세권. 이 책을 샀던 사람들은 그녀가 파시스트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몰랐을까.

프리모 레비의 책에는 이 작가의 자살 소식이 실린 <뉴욕타임스>와 <뉴욕리뷰 오브 북스>  의 서평 기사가 오려진 채로 끼워져 있었다. 아마도 레비의 자살 소식이 실린 기사를 읽고 이 책을 샀나 보다. 그 자신이 반파시즘 빨치산이었던 레비는 그 경험을 이 소설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인간인가>와 <주기율표>가 자전적 수기임에 비해 이 책은 ‘소설’이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로서 그는 ‘시대의 증언’을 위한 글쓰기에서 ‘소설로서의 글쓰기’로 나아갔다. 자신이 겪은 잔혹한 경험은 소설 이전에 사실로서 기록되어야 했던 것이다. 소설은 ‘사실’ 이후에야 가능한 형식이다.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에서 와서 그는 비로소 ‘소설적 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국내에도 얼마전 출간 됐는데, 언제 ‘리뷰’를 올릴 수 있을까.)

파리와 뉴욕의 두 헌책방에 대한 기억은 이런 것이다. ‘물질’로서의 책은 활자가 찍힌 종이의 묶음이 아니다. 그 물질로서의 책이 실어 나르는 것은 콘텐츠와 저자-독자 사이의 내밀한 교류뿐만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아우라, 기억들이기도 하다. 책과 그 책을 함께 읽었던 사람들이 남긴 기억의 냄새. 그 기억의 매개로서의 책은 새것이 아니라 적당히 낡은 것이 좋다. 아무리 생각해도 헌책방 순례가 퇴행성 질환이라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