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의 이틀
장정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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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터넷 보수신문 대표를 만난 적이 있었다. 내가 그를 찾아갔을 때 그는 사무실이자 편집국인 한 오피스텔에서 동료 ‘기자’ (그들도 언론이며 기자를 자처한다.) 한명과 냄비에 라면을 끓여 먹고 있었다. 그는 김치 쪼가리를 삼키며 자신이 DJ정권에게 얼마나 탄압을 받았는지에 대해 떠들어댔다. 며칠째 감지 않아 냄새가 나는 머리와 눈꼽이 채 떨어지지 않은 몰골로 라면 국물을 튀겨가며 계속 지껄였다. 과연 그는 정권의 탄압을 받아 오랫동안 수배생활을 한 반정부 인사의 면모를 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천박한 말들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자신의 신문이 아직도 광고 탄압을 받아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으나 한 월간지 대표와 같은 ‘뜻있는’ 동지들이 도와주고 있다고 했다. 그분들과 함께 얼마 후에 있을 3.1 구국궐기 대회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은 민주화 이후의 개명천지에 독립군을 자처하고 있었다.   

  

가끔 모자를 쓴 그의 동료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억거렸다. 그들은 몇몇 시민단체와 개인들에게 “빨갱이”라고 했다가 소송을 당했고, 결국 법원으로부터 벌금형을 받았다. 한 시간여 그의 사무실에서 이야기를 하다 나오는데, "야 이 또라이 새끼야"라는 말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나는 저런 ‘존마니들’이 보수와 우익을 자처하다니, 참으로 추하고 비루하다고 느꼈다. 장정일이 우익청년 일대기를 쓴다고 했을 때 그의 선배는 “우익은 무조건 멋있어야 해”라고 말했단다. 현실의 비루한 우익과 존재하지 않는 멋있는 우익 사이의 이 아득한 ‘거리’. 그래서 장정일의 <구월의 이틀>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익에 대한 위악적인 풍자다. 위악은 장정일의 특기가 아닌가.  


장정일이 10년 만에 냈다는 이 소설을 주말 동안 슬렁슬렁 읽었다. 그는 광주 출신의 ‘금’과 부산 출신의 ‘은’을 내세워 올드라이트, 뉴라이트와 대비되는 ‘퓨어 라이트'(pure light)를 그리겠다고 했다. 이 시대를 달리하는 ‘라이트’들은 동성애 코드로 연결돼 있다. 올드 라이트 ‘거북선생’과 퓨어 라이트 ‘은’은 비역질로 연결된 변태성욕자들이다. 동성애 자체가 변태성욕인 것이 아니라, 도덕을 내세웠던 네오콘 대부 앨런 블룸이 동성애자로 에이즈로 죽었듯이, 그리고 장정일이 그를 두고 “손가락질 받아야할 것은 동성애가 아니라 그의 위선이다”라고 썼듯이, 이념과 섹스의 그 추악한 모순적 병존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올드’에서 ‘뉴’, 그리고 ‘퓨어’로 갈수록 변태성욕의 강도는 상대적으로 덜하다. ‘올드’의 외설성과 변태성욕은 가장 강도가 높다. 실제로도 그들은 막무가내의 가스통 무리가 아니던가.

가령 그것은 “우리가 김대중이나 노무현을 따르는 무리를 향해 ‘빨갱이’와 같은 인장을 찍어대는 것은, 그만큼 우리들에게 논리가 없기 때문이야. 다시 말해 저 인장들은 그들과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결단을 보여주는 것들이지.(…) 그래, 그거야. 말 많고 따지기 좋아하는 놈들을 향해 다짜고짜 ‘빨갱이’라는 인장부터 찍고 보는 거야. 그건 상대방과 대화를 더하지 않겠다는 우리들의 고귀한 거절의사고, 결기에 찬 그 침묵은 우리들의 패배이지만, 그 행위는 더 이상 논리가 아니고 바로 우리들의 힘이야. 그래서 이기는 거야” 와 같은 변태성욕이다.

거북선생은 국립대 윤리교육과 교수이고 뉴라이트인 ‘은’의 작은 아버지는 법대 교수다. 또 은이 가입한 우익청년단체 ‘자유의 나무’의 회원의 이름은 ‘변지갑’이다. 이쯤 되면 이들이 누구를 빗대고 있는지 알 만하다. (장정일의 장난질이다. 거북선생은 조선일보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윤리교육과 교수를 닮았고, 뉴라이트인 작은 아버지 이름은 ‘상호’로, 가운데 이름자 슬쩍 바꿨다. 변지갑은 굳이 첨언이 필요없다.)  광주의 시민단체 지도자로 있다 노무현 청와대의 비서관으로 등장하는 금의 아버지 역시 여러모로 누군가를 닮아 있다. 물론 대강의 이력과 인상만 빌려왔을 뿐 장정일식으로 비틀었겠지만 말이다. 장정일은 가장 애정이 가는 인물로 은을 꼽으며, 구우익과 뉴라이트의 영향아래 있지만 사상투쟁을 거쳐 자긍심에 찬 젊고 순수한 우익으로 단련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은이 유일하게 앞세대의 우익과 다른 면모가 있다면 그는 최소한 구우익의 ‘위선’을 볼 줄 안다는 점이다. 마태수난곡을 들으며 자신이 빨갱이들한테 어용이니 회색분자니 하며 당했던 지난날을 회고하는 거북선생에게 그의 젊은 동성애 파트너 은은 “이 미친 늙은이, 노망도 단단히 났네. 도끼로 정수리를 꽉 찍어버릴까 보다. 이런 늙은이들은 대체 언제까지 이처럼 어리광을 부리려는 것일까”라며 속으로 비아냥댄다. 은은 “강한 것은 선하고, 강한 것은 아름답다”는 강자의 이익을 정당화하는 신념으로 무장한 우익청년. 장정일은 이런 순정한 우익이 이 땅에서 가능할 것이라 믿고 있을까. 이 소설로 보자면 장정일은 희미한 가능태만 보여줬을 뿐이다. 그러나 그 가능태는 변태성욕자이자 ‘또라이’다. 순정한 우익이야말로, 순수한 또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 소설은 장정일의 위악이자 우익에 대한 조롱인 것이다.

장정일의 ‘변태성욕’은 참으로 내력이 깊은데, 이 자의 첫 번째 소설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에서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이 소설은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다. 나는 1988년 열음사에서 나온 이 문고판 작품을 알고 있거나 읽어본 사람은 이제껏 두 명 밖에 못 봤다. 흔히 장정일의 첫 소설은 <아담이 눈뜰 때>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이 작품이 시인이었던 장정일이 처음으로 쓴 소설이다. 장정일은 어쩐 일인지 책날개에 소개된 작품목록에 이 작품을 계속 빼놓고 있다. 스스로 부정하고 싶은 건가?) 소년원에 처박힌 10대들의 ‘비역질’을 소재로 한, 이 소설도 논픽션도 아닌 것 같은 작품에서 변태성욕은 장정일의 자기모멸을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그의 자기모멸은 <아담이 눈뜰 때>의 몇몇 단편을 거쳐 <너에게 나를 보낸다>,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내게 거짓말을 해봐>로 이어진다.

그의 소설을 이제까지 거의 다 읽어왔지만 이제는 이런 변태성욕이 구질구질하고 지겹다. 게다가 장관 청문회식 어법으로 따지자면, 그의 ‘자기표절’도 지겹다. 뒷 소설에서 앞 소설을 인용하고 까대는 방식의 자기표절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빙빙 동심원을 그린다. 그의 전작들은 후작들에서 줄줄이 불려 나와 조롱하고 조롱당한다. <구월의 이틀>에서는 전작인 <보트하우스>를 소환해 작가인 자신을 “3류 작가”라고 폄하하고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특전사 캠프에 대한 주인공들의 독백조차도 그의 독서에세이 <공부>의 한 대목을 빌렸다. 이런 장난질에 무슨 미학적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니 굳이 거기에 토를 달 필요도 없으나, 이제는 좀 짜증이 난다. 내가 꼽는 장정일의 가장 좋은 소설은 <아담이 눈뜰 때>와 장정일 <삼국지>의 출발점이 된 <북경에서 온 편지>다. 아니 차라리 그의 <독서일기>나 <공부>가 장정일 식의 교양과 해석을 담고 있어 더 읽을 만하다.

장정일은 후기에서 부도덕한 우파가 득세한 나라에서는 우익청년 일대기가 나올 수 없다고 말한다. 한국문학이 줄창 ‘좌익 청년 일대기’만 쏟아낸 까닭도 그 때문이란다. “건전한 상식과 철학을 갖춘” 나라에서 나온 우익청년 일대기의 대표작은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일 것이다. 예술적 방랑이라는 ‘수업시대’를 거쳐 보편적 가치에 대한 긍정에 이르는 여정은, 현실의 질서와 가치에 대한 수락이라는 점에서 ‘우파적 인식’의 획득과정이다. 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 괴테와 장정일이 공유하고 있는 바가 있다면 과정이자 매개로서의 예술이라는 경로다. 괴테의 빌헬름은 연극이라는 예술을 경유하여 ‘아름다운 영혼’에 눈을 뜨고, 장정일의 ‘은’은 시와 세계문학사 60권을 거친다. 은이 우익으로 전향했을 때, 문학은 더 이상 그의 몫이 아니고 정치에서 문학으로 나아간 ‘금’의 몫이 된다.

괴테가 살았던 바이마르 시대의 문화와 가치는 그같은 긍정과 수락을 가능케 하는 전통과 힘, 깊이와 넓이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우리의 경우 전통과 기성의 가치는 부정과 파괴의 대상이었다. 조화와 균형, 감성과 절제와 같은 미덕들은 한국의 우파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가치다. 앞서 김기협 선생이 조선 망국에서 단절된 것은 ‘전통’이라고 했을 때, 지적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었을 것이다. 유교적 교양의 정치가 단절되지 않았더라면(유교의 근대화에 성공했다면), 오늘날의 한국정치는 좀더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오늘날의 보수우익이 끊임없이 자신의 사상과 행위를 조회하고 심문할 수 있는 규제적 원리로서 전통이 있었다면, 적어도 추하고 비루한 모습에서는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전통이 없으므로 그것은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 조선일보와 낙성대 연구실은 식민지 근대화론을, 이승만과 건국을, 박정희와 경제발전을 ‘발명’하고, 새로운 전통으로 수립해야 하는 역사적 사명감으로 충만하다. 장정일의 위악은 이런 전통의 발명 ‘이후’를 내다본 것일까, 아니면 지금 여기의 비루한 현실을 드러내는 방식일까.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발견한 오탈자는 대략 6-7개 내외가 되는 것 같다. 그중 가장 치명적인 것은 노무현의 고향마을을 ‘봉화’마을이라고 쓴 것이다.(245p) 노무현의 고향은 ‘봉하마을’이 맞다. 이것이 편집자의 실수라면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장정일의 실수라면 치명적이다. 이 소설에서 노무현은 다큐멘터리를 상기시킬 정도로 세밀하게 등장한다. 그런데 실수라? 그렇다면 장정일은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가 치밀하지 못했던 것이고, 정교하지 못한 시사교양을 버무려 써낸 것이다. 이건 정운찬과 정운천을 헷갈려 “저번엔 쇠고기 갖고 지랄이더니 이번엔 세종시 갖고 지랄이냐”고 반응하는 멍청한 네티즌과 같은 수준인 것. 이로써 보건대, 장정일의 노무현에 대한 교양수준은 믿을게 못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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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03-15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대구 영남대 도서관에 소장돼 있음. 90년대 중반 읽었음

이진성 2010-03-15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리고 '봉화마을'에 대해 굳이 장정일을 변명하자면
마을 이름은 '봉하'마을 투신한 산은 '봉화'산
마을은 '봉화'산 아래 있다고 해서 '봉하' 마을임

모든사이 2010-03-15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 그래, 누가 도서관에도 책이 없다던? 어딘가에는 있겠지만, 장정일 독자가 자기가 밝힌대로 5만은 된다면 그 책을 언급하는 사람이 좀 나올 수 있을 텐데, 거의 없어서 하는 얘기지.

봉하/봉화 얘기를 꺼낸 건, 이 책 앞부분에 장정일이 언어/문장에 대한 자의식을 도드라지게 떠들어서 하는 말이다. 주인공 부모의 말을 전하면서 "문법에 맞지 않는 말을 구사한다" 운운하며 예민하게 써놨길래 하는 소리다. 셜록홈즈를 말하면서 베이커가(baker street) 221B를 베이크가(bake street)이라고 쓰면 얼마나 우스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