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서 본 한국사 - 김기협의 역사 에세이
김기협 지음 / 돌베개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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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선생은 사학자로서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공과대학에 입학한 그는 사학과 대학원을 가서 동양사를 공부해서 대학교수가 됐다. 마흔 무렵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질문 끝에 잘 나가던 대학교수직을 때려 쳤다. 그는 38살 무렵에 처음 읽은 아버지의 ‘일기’가 자신의 정체성을 자유롭게 풀어놓게 된 계기가 됐다고 했다. 알려져 있다시피 그의 부친은 6.25 전란의 와중에 유명을 달리한 김성칠 전 서울대 교수. <역사 앞에서>라는 표제로 공간된 그의 일기는 전쟁이라는 극한적 상황 속에서 ‘기록과 관찰’이라는 지적 노동을 성실하고 세밀하게 실천한 전범적 사례다. 김 선생은 그후 중앙일보 객원 논설위원으로 이 신문의 대표적 연재칼럼인 ‘분수대’를 다년간 집필했고, 출판기획자 등을 거쳐 재야(?) 사학자가 됐다. 중국의 고대역법으로 석사학위를, 마테오리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블로그(http://orunkim.tistory.com/)에 따르면 프랑스와 일본, 미국, 중국 등에 ‘지적 방랑’을 하며 ‘외부자의 시선’을 기른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김선생의 <밖에서 본 한국사>를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건, 기존 역사서에 배어있는 ‘분노와 격정’이 싹 가신 문체가 주는 편안함이었다. 간난신고의 한국사를 읽다가/쓰다가 보면 누구나 열정적 민족주의자가 되지 않던가. 임지현처럼 민족주의를 해체하는 지점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그것을 서너 발자국 떨어져서 요모조모를 살피며 소크라테스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정신적 국외자만이 확보할 수 있는 ‘거리’이리라. 그가 한국사학자가 아니라 동양사학자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 실린 김선생의 많은 글들은 이른바 춘추필법의 준엄한 평가이거나 역사적 교훈을 결론으로 도출해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사태의 옆에서, 뒤에서 이런 해석과 저런 평가를 적절하게 배치하여 서술하는 양상이다. 선생이 말한 중층적 시각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이중정체성의 존재로서 ‘조선족’의 시각을 채택하는 것) 나로서는 그것을 좌충우돌(左衝右突) 전략, 성동격서 전략쯤이라고 말하고 싶다. 민족적 당위성을 주장하는 목청 높은 언설에는 중국과 일본의 영향과 상호작용을 말하고, 한국사의 위대한 인물을 치켜세울 때는 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조건과 상황을 서술하는 식의 거품빼기 전략 말이다. 


한국사에 대한 서술은 과잉 민족주의거나 뉴라이트 쯤으로 양분되어 있는 것 같다.(아마추어인 나로서는 ‘같다’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과잉민족주의 언설에 대한 해체적 비판은 엉뚱하게 우파적 역사해석에 힘을 실어준다. 가령,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의 필자들은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론적 진보의 시각으로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데, 그것의 귀결은 보수담론의 입지를 강화하는 ‘정치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윤해동 선생이 어느 글에선가 “포스트주의와 보수의 부적절한 만남”이라고 썼던 것이 어설프게 기억난다. 가장 급진적인 이론적 논리가 보수담론으로 귀결되는 이 기이한 현상을 어떻게 봐야할까. <재인식>의 집필에 동원된 상당수의 필자들은 이론적 좌파이자 ‘전향’은커녕 생래적으로도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김선생의 <밖에서 본 한국사>는 이 둘 어딘가의 중간쯤, 혹은 두 담론이 대립되어 있는 지점 바깥의 어느 곳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이 내게 일정한 ‘계몽’의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면 바로 이런 ‘좌’에 부딪치고, ‘우’를 깨는 좌충우돌식 접근이 주는 해체와 재구성의 역사서술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책은 최근 김선생이 프레시안에 연재하고 있는 ‘망국 100년’(http://www.pressian.com/의 모티브인 것으로 보인다. 근세사에 대한 서술의 일부는 망국 100년의 초기 글들과 겹쳐 있기도 하다. 그는 조선의 멸망은 1910년의 한일병탄에 있는 것이 아니라, 1897년 대한제국의 성립에 있다고 말한다. 잃어버린 것은 국가라는 실체이거나 민족의 단절이 아니라, ‘전통’이다. 중국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진 조선의 오랜 ‘화이부동’의 전통, 조선의 문화적 역량의 힘이 훼손되거나 단절되었다는 것이 더 중요한 대목이라는 것이다. 이는 내재적 발전의 과정이 일제의 침략으로 가로막혔다는 진술과 다르다. 농본주의 체제를 고수한 조선은 뒤이은 상공업 발전을 효과적으로 견인해내지 못했다. 조공체제의 대외관계는 근대적으로 혁신되지 못했다. 성리학은 소중화를 자처한 채(김선생의 말을 빌면, 차라리 眞중화), 근대적 삶을 해명하고 이끌어내는 사상으로 변형되지 못했다. 일본의 침략은 이러한 단절의 과정을 가속화하고 최종적으로 마무리한 것이다.

<밖에서 본 한국사>에는 기억할만한 대목들이 많다. 내 연필은 개개의 사실을 말할 때보다 그의 해석과 평가에 더 많은 밑줄을 그어댔다. 일본과 중국의 근대사를 관심있게 읽어온 처지에서 그중 주목이 갔던 것 중의 하나는 일본에는 존왕이라는 제3의 길이 존재했던 반면, 한국은 쇄국과 개항이라는 이분법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대목. 일본의 근대화는 천황제의 근대적 발명과정이기도 했다. 천황-막부로 이어진 이중권력의 상태에서 일본의 근대는 천황과 막부를 떼어내는 것과 양이에서 문명개화로의 극적인 변화가 어울려 가능했다. 존왕은 봉건제로의 복귀가 아니라 근대적 입헌군주국가로 가는 지름길이었던 것. 김기협 선생은 고종의 대한제국 수립과 일제에의 저항이 국가를 수호하려는 것인지, 왕권을 수호하려는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고 쓰고 있다. 나로서는 그건 왕권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내의 피살에 놀라 피신한 아관파천만 봐도 그렇다. 왕권의 회복=근대화였던 일본과 한국이 결정적으로 다른 대목중 하나일 것이다. 역시 한국사를 읽는 건 재미보다는 우울함을 배가시키는 경험이다.

기억해야할 서술들(메모 혹은 요약) : 중국의 천하체제는 천자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는 구조로, 춘추시대에 형성되어 중국의 대외관계의 기본원리가 되었다. 한민족은 ‘화이부동’의 태도로 독자적인 생존을 이어왔으며, 그것의 본령은 군사적 힘이 아닌 문화적 힘이다. 낙랑은 점령군이 아니라 중국문명의 송유관 역할을 했다. 임나일본부설을 가야-왜 복합체로 해석하는 것. 한국과 중국은 고구려의 공동상속자였다. 신라의 당 원조(김춘추) 요청은 통일의 야망이 아니라 생존술 이었고, 통일전쟁의 핵심적 역할도 당나라 군대가 했다는 것. 신라의 진정한 통일은 당나라와의 저강도 전쟁으로 한반도를 민족정체성의 구성공간으로 지키고 만들어낸 것이다. 한민족의 공간은 고려의 천리장성 축조로 반도화되었다.

몽골에 대한 고려의 항복조건은 평등조약에 가까운 것(?)으로 항쟁의 성과라는 것. 공민왕은 비록 좌절했지만 고려중흥을 위한 개혁군주였다. 변방무장(이성계)과 정예문신집단의 접점이 조선의 출발점이었다. 고려말 개혁의 좌절은 개혁주체가 집권 이후 기득권에 집착했기 때문인데, 주체만 달리한 채 개혁을 반복한 것이 근본적인 문제다. 사대는 춘추시대 이후 천하질서의 원리로서, 사대와 사대주의는 권위와 권위주의의 차이와 같다. 사대는 명나라와의 대외관계 속에서 조선이 만들어낸 존재방식이다. ("임진왜란 때 외에는 명나라 군대가 조선에 주둔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이 사대관계는 지금 남한의 미국에 대한 종속관계보다 독립성이 강한 것이다." p. 180) 일본이 들고 나온 만국공법 체제는 허구의 평등을 전제로 한 것으로, 작고 약한 나라를 보호할 필요를 부정하는 약육강식의 정글이었다.

한국이 독립을 지켜온 것은 화이부동의 문화노선을 견지해온 덕분이며, 이 노선을 안정시킨 것이 세종의 업적이다. 성종 이후의 사화는 성리학적 통치의 주체로서 사림이 자리잡는 과정의 진통이었다. 광해군은 폭정이 아니라 정치투쟁의 와중에 폐위된 것으로 그것은 그의 정치력이 가진 한계다. 청은 입관 후에 합리적 조공관계로서 중-조 관계를 재조정했다. 정조의 서학에 대한 태도 : 정학의 쇠퇴가 가져온 그림자일 뿐, 그림자를 주물러 현실을 바꿀수 없다는 실용주의. 서학은 보유론으로서 중국에 적응하려 했는데, 학문적 실천으로서의 보유론과 신앙적 실천의 두 갈래에서 탄압의 와중에 근본주의로서의 신앙적 실천만이 살아남았다. 이로써 조선 천주교는 조선의 주권을 부정하는 성향을 보였고, 이는 정조의 탕평책에서 세도정치로 넘어가는 전환점의 소용돌이에 서학이 말려든데 있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독교의 신앙적 순수주의, 이후 한국기독교의 ‘전통’인 보수반공 기독교의 형성과도 연관이 될 듯하다.)

조선은 농본국가체제의 근본틀을 바꾸지 못했고, 임란이후 형성된 상공업 체제 역시 정경유착을 부채질해 체제를 약화시키는 작용을 했으며, 조선은 이런 과정을 통해 기울어져 갔다. 일본에게는 서세동점의 현실속에서 존왕이라는 제3의 돌파구가 있었으나, 조선은 쇄국과 개항의 이분법에 묶여 있었다. 조선 은 중국의 천하체제에서 벗어난 일단계의 망국을 거쳐, 일본의 지배아래 떨어진 2단계로 마무리됐다. 고종이 수호하려던 것이 재위 40년의 행적으로 볼 때, 국권인지, 왕권이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임정이나 해외에서 정치다운 정치가 나오지 못한 것은 조선이 정치의 전통을 제대로 남겨주지 않은데 큰 이유가 있다. 이승만의 퇴임자리에 있었던 것은 송요찬 국방장관, 허정 외무장관(대통령 유고시 대리인), 그리고 미국 대사 매카너기였다.(최후의 보루인 군부와 미국) 이승만은 무능을 드러내고 미국에게 해고당한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성격을 여실해 보여주는 세 사건 : 반민특위 탄압, 보도연맹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재벌체제는 권력중독증이 경제계에 투영되어 나타난 것이었다.(독재와 재벌의 쌍생아적 구조) 과거처럼 특권의 주재자가 아닌 두 대통령 아래 남한 상당한 자생력과 안정성을 가진 국가로 변신할 수 있었다. (이는 김대중 - 노무현의 노선에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 대목으로, 김선생의 정치적 지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얕은 층위의 가치훼손과 깊은 층위의 가치관 훼손이라는 두 층위가 존재한다. 애국자임을 자부하는 한국인들이 공유하는 것은 일본의 관점을 내면화한 것들이 많은데, 이는 거울에 비친 오리엔탈리즘이다. 일본의 한국통치의 유산 중의 하나는 “한국인의 눈에는 모든 공무원이 권력자였고, 순사와 군인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는 것.(국가에 대한 한국인의 심성구조에 자리잡은 불신과 저항의 내력은 이러하다.)

남북관계에서의 변화는 평형상태를 벗어나는 데 있는데, 평형에 집착하는 상호주의로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가 없다.(보수의 상호주의에 대한 이색적이고도 발본적인 비판이다.) “인구의 안정을 설명하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것을 인간에 대한 태도가 한 차례 정리되는 것으로 나는 본다. 산업화는 자연을 타자로만 보는 공격적인 태도로 출발했다. 이제 더 이상의 공격은 인간 자신에 대한 공격이 아닐 수 없는 상황에 와 있다. 인간과 자연을 묶어서 보는 생태론을 이제 아무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세계 인구의 평형상태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공격을 야기할 가능성이 크다. ‘평형’을 깨는 것은 인간의 삶에 불가피한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2007년 대선에서 후보들은 높은 경제성장률을 공약으로 내걸었는데, 4년 후 선거에서는 아마 극우파 후보들만이 그런 공약을 들고 나올 것이다. (이런 예측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이런 예측대로라면, 진보가 요즘 주장하는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한 이른바 ‘성장친화형 진보’는 어떻게 가능할까? 과연 그건 진보일까, 성장일까?) 과거에는 근공원교였지만, 이제는 근교원공의 시대로 향하고 있다. “국민국가의 벌거벗은 이기심을 지역차원에서 정제, 순환하지 않고는 세계차원에서 효과적 화합을 바라볼 수 없다.”  “동아시아 지역은 19세기 이전에 위대한 문명전통을 가지고 있었지만, 산업화의 물결에 휩쓸린 후 한 세기 반동안 이 전통의 가치를 잘 살리지 못했다. 유대감도 전통도 별로 요긴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팽창의 시대는 앞만 보고 달릴 뿐, 뒤를 돌아보지 않는 시대였다. .. 균일한 가치의 획득을 위해 만인이 경쟁하는 동이불화의 세계는 자원의 벽앞에 파국을 면할 수 없다. 다양한 가치관이 병행하는 화이부동이 인류의 존속, 인류다운 인류의 존속을 보장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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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3-15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광무개혁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은 고종을 근대개명군주로 해석하려고 하던데, 사실 일본의 존황양이파와는 다르다는 주장이 눈에 뜨이는군요.

모든사이 2010-03-15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고종이 과연 근대개명군주이자 망해가는 조선을 일으켜세우려던 근대적 개혁가인지 도대체 모르겠더라구여. 서울대 이태진 교수님이시던가요? 일제에 의한 패망이 주는 비극성과 안타까움의 한 표현이라는 '이해'는 들어도, 대체 동의는 할수 없더라구여. 그게 다 제가 문외한인 탓이겠지요.

노이에자이트 2010-03-15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영우와 이태진이 대표적이지요.한영우는 더 보수적입니다.건국60주년 기념사업 때 그런 특징이 더 드러났지요.이태진은 민비나 대원군까지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고종황제 역사청문회>는 고종시대를 둘러싼 논쟁을 담은 책인데 특히 김재호와 이태진의 논전이 볼만합니다.김재호는 전문적인 경제사학자의 시각에서 고종시대의 근대화가 별볼일 없다고 주장하지요.

강준만<한국근대사 산책>에서 고종시대에 대한 각주의 인용문헌에도 읽어볼 만한 책(신문,잡지 포함)이 많이 나오니 한번 검토해 보십시오.

모든사이 2010-03-17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한겨레를 보니 김용섭 교수의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해 사학계의 논쟁이 재연된 모양이더군요. 김재호 교수도 거기 가세한 것 같은데.. 의견 감사드립니다. 말씀하신 '보수성'은 결국 과잉민족주의의 산물이 아닌가 생각이 되는 군요. 강준만의 '한국사 산책' 시리즈는 그 특유의 저널적 글쓰기라고 생각돼 개인적으로 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기회되면 한번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3-17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해동의 논문이 촉발했더군요.자본주의 맹아론은 진작 비판대상이지만 윤해동은 김용섭 학설을 직접 분석한 상당분량의 논문이더군요.<역사학의 세기>에 실린 다른 논문도 주목할 만하니 정독하려고 합니다.김재호를 비롯한 낙성대 학파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뉴라이트 운동하는 집단이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이들이 많은데 내재적 발전로-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한 비판은 주목할 만하다고 봅니다.

강준만의 산책 시리즈 밑의 참고문헌을 보면 중요한 연구성과는 단행본이나 논문은 물론 정기간행물에 실린 글까지 거의 다 망라되어 있어서 그 책 찾아보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될 것입니다.

미국사람 2011-08-20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김기협이 김성칠 선생의 아들이라는건 오늘 처음 알았네요.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군요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