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 순례는 세가지 욕망에서 비롯한다. 그 첫째는 ‘의외의 발견’에 대한 기대다. 사고 싶었으나 품절되어 구할 수 없는 책을 발견한다거나 오래 전에 나온 책 가운데 이런 책도 있었네 하는 경우다. 이미 품절된 지 오래고 다시 나올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이는 아도르노의 <신음악의 철학>(까치) 같은 경우가 전자일 것이고, 60년대 졸부들의 거실을 채웠던 전집류 중의 하나인 <세계의 대사상> 시리즈에서 트로츠키주의자이자 제4인터내셔널의 이론가였던 아이작 도이처의 <스탈린 평전>을 발견하는 경우가 후자다. 반공주의가 극성이던 시대에 극좌라 할 수 있는 도이처의 책이 소개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런 빨갱이 저자의 책이 나올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 책이 스탈린 비판을 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걸 핑계로 서슬퍼런 ‘간윤’의 ‘필증’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인데, 물론 여기에는 지금도 그렇듯이 공안담당자들의 무식함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진보당의 조봉암이 사법살인을 당하던 시대에 전집에 이런 책을 슬쩍 끼워 넣을 줄 안, “심장이 왼쪽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던” 편집자의 센스가 돋보이는 것이다.

두 번째는 돈이 없어 포기했던 책을 싸게 대량구매할 수 있다는 것. 이런 경우 카드를 남발하게 되고, 책에 대한 어떤 예의도 없이 그저 노끈으로 책을 묶어 사들고 오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워낙 많은 책을 샀으므로 살 때의 욕망과 달리 읽기도 거의 포기하거나 한두권에 그친다. 이런 책 사재기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나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리즈 같은 것들에 ‘삘’이 꽂힐 때 감행된다. 처음으로 헌책방에서 대량 사재기를 한 것은 1980년대 뿌리깊은나무에서 나온 <구술 민중자서전> 20여권을 샀을 때다. 서울역 주변의 헌책방에서 샀다. 내가 만난 우리나라 최고의 '읽기 매니어'와 함께였다. 평범한 민중을 불러내어 지역의 토박이 언어로 살아온 내력을 구술케 한 이 시리즈는 90년대 이후 널리 확산된 ‘구술사적 역사방법론'의 선구적 사례로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세 번째는 초판본이나 고서와 같은 오래된 책에 대한 욕망이다. 한문해득에 능하지 못하니  그야말로 ‘고서’의 진가를 알아볼 리도 만무하고, 더구나 그같은 책은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내가 감히 꿈도 못꿀 터이니, 겨우 살 수 있었던 책의 연대기는 60년대 어름까지가 한계다. 인사동 고서점인 통문관을 그닥 좋아하지 않은 까닭도 그것이다. 이런 서점은 일반인 헌책방 순례객의 공간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식민지 시대에 출간된, 그만큼 세월의 두께가 느껴지는 책을 구경만 하다 입맛만 다시며 발길을 돌려야 했던 기억은 조금 씁쓸하다. 창비의 편집위원인 최원식 선생이 한 평론에서 1948년에 나온 레닌의 <제국주의론> 번역서를 인용한 것을 읽었을 때, 그 시절 그 책을 번역한 한국의 볼세비키 추종자의 열정을 생각했었다. 왜 나는 비평을 보면서도 각주에 인용된 책의 ‘연대’에 눈길이 가는 것일까. 이런 스노비즘도 병이라면 병이다.

바로 그 세 번째 경우에서 잊혀지지 않는, 그리고 조금은 후회되는 기억이 있다. 1990년 여름, 전주의 구시가지를 산책하다 그 주변에 즐비했던 헌책방을 들어갔을 때, 일제 시대 나온 일본의 마르크스주의 책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제목에 마르크스라는 일본어가 박혀 있고, 출간일이 쇼오와(昭和) 00년 식으로 찍힌 이 책들에는 세월에 바랜 만년필 메모나 밑줄도 있었다. 낡은 나무 책장 서너 칸 쯤을 차지하고 있던 이 책들을 보면서 이게 동경에 유학했던 호남의 ‘마르크스 뽀이’들이 탐독했던 책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 염상진이 ‘동무’들과 읽었음직한 책들, ‘소년 빨치산’이었던 박현채 선생이 유년기에 읽었음직한 책들 말이다. 그들은 이런 책들을 독파한 뒤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거나 삼팔선을 넘어 북으로 갔을 터였다. 대구가 좌파들이 득시글대는 ‘동방의 모스크바’였다지만, 전주니 광주도 그에 못지 않은 좌파 지식인들의 집단서식지였으니 이런 짐작이 틀리지는 않았으리라. 일어를 못해 비록 읽지는 못할 지라도 한 두권쯤 살 수 있었을 텐데, 가난한 대학생이니 책장만 쓸어본 채 나오고 말았다. 때로 책은 내용보다 '아우라'로 감동을 전달하기도 하는 것이다. 몇 년 후에 다시 전주를 방문했을 때 그 많던 헌책방들은 거의 사라지고 없었고, 당연히 이 책들도 폐지수집상의 수레로 쓸려들어갔을 것이다.

내가 제법 큰 돈을 주고 샀던 '오래된 책'은 고 임종국 선생이 편집한 <이상전집>(1956, 고대출판부) 초판본이었다. 이상문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진 것은 아마 이 전집의 공로가 크다고 할 것이다. 하드커버라기엔 너무 소프트한 표지, 낡은 갱지에 인쇄된 본문, 지금의 북한식처럼 보이는 명조체 활자, 세로 조판의 두권 짜리 전집의 가격은 15만원. 그 후 이어령의 전집(1977-1978, 갑인출판사), 김윤식․이승훈의 문학사상사판 전집(1989-1993), 가장 최근에는 김주현의 전집(2009)이 나왔으나 모두 출발은 임종국의 이 전집일 것이다. (임종국 선생의 이상연구와 친일문학연구 사이, 곧 모더니즘과 민족주의(혹은 실증주의)의 간극과 길항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임종국 선생의 이 <이상전집>은 한 지인이 서대문에 ‘어제의 책’이라는 헌책방을 열었을 때 3만원을 받고 팔아버렸다. 젊은 나이에 책이 좋아 헌책방을 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돋보였고, 사라져 없어진 서점 ‘오늘의 책’의 역사를 잇겠다는 옥호(屋號)에 감명받은 바 있어 “헌책방이라면 이런 정도 책 한 두권은 구비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미련없이 판 것이다. 내게는 문학사상사판 전집도 있으니 판본비교 같은 쓸모없는 짓을 하지 않을 바에야 기부하자는 생각에서였다. 그 책을 산 어느 호사가에게 복이 있을 진저.  

9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서울역에서 남영역으로 이어지는 도로 주변에는 헌책방이 가로로 죽 늘어서 있었다. 대개의 책들은 참고서거나 허접한 삼류 소설들이었으나 그 사이에 가끔 보물이 끼어 있었다. 또한, 이광수, 김동인 류의 근대소설가들의 초간본 책들도 안전한 카운터 뒷자리에 꽂혀 있었다. 이광수의 <무정> 초간본이라든가(초간본이긴 해도 표지는 심하게 닳았거나 아예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같은 책들. 대개의 책들이 당시 가격으로 10만원이 넘었으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책들의 가치를 생각해보면 그 정도 금액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윌리엄 모리스가 만든 초서의 책 

 

책의 ‘내구성’을 구성하는 한 측면이 내용의 지속가능성이라면, 다른 측면은 물리적인 것으로서  제책의 견고함일 것이다. 분명 전후 미국원조를 통해 들어왔을 질나쁜 종이에 인쇄된 50~60년대의 책은 그런 측면의 내구성이 무척이나 허약하다. 식민지 시대에 나온 근대간행물들도 사정은 거의 비슷하다. 한지로 만들어진 옛책의 견고함과 내구성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전후에 나온 책들을 보면 마구잡이로 지어진 판잣집 같다는 인상이다. 여태까지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산책 중 60-70년대 책 중에 대중적으로 널리 보급되었으면서도 장정이나 제책 면에서 점수를 줄만한 것은 신구문화사에서 나온 <전후문제작품집>(1964) 시리즈다..(미국의 비트세대 소설가들이나 이시하라 신타로의 <태양의 계절>, 다자이 오사무의 <사양>같은 소설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아마 이 전집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에 책의 명장 윌리엄 모리스가 없다는 것은, 아니 명장이전에 한지로 만들어진 옛책이 충분히 ‘근대화’되지 못한 것은 참으로 불행한 사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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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 2010-03-05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형, 임종국 이상전집 나한테 한 권 기증한 거 기억 안 나우?
근데 나한테 준 건 또 어디서 구한 거유?

이진성 2010-03-05 1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헌책방에서 고른 책중에 내가 점수를 준다면 정음사판 셰익스피어전집!
번역도 장정도 최고!
게다가 가격까지. 헤이리 헌책방에서 권당 500원에 샀다면 믿겠수?

모든사이 2010-03-05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한권을 따로 구했던 거 같다. 내가 여기서 언급한 건 묶음으로 산 온전한 전집 한질이라..ㅎㅎ 정음사판 세익스피어 전집은 아직도 여기저기 많아. 근데 그건 사고 싶지도 않고 읽고 싶지도 않아.

미국사람 2011-08-20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기 책방 순례에 미친 양반이 또 있군요.

근데 그 책을 어디에다 쌓아두지요....
한20년 모으면 집이 좁아져서....
마누라 등쌀에 견디기 힘들게 되지요...

어쨌건 동업자를 만난 것같아 흐믓합니다. 다만 저와은 독서 취향이 달라 이 블로그에서는 건질 것이 별로 없군요. 하지만 건질 것이 있는지 천천히 다시 보아야 할 것 같군요. 꾸뻑

모든사이 2011-08-21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할때마다 한 짐씩 정리하지요.ㅋㅋ 재작년 이사때는 책장 두개 분량의 책을 후배에게 '분양'해 주었지요. 아, 그리고 우리나라 만화방에 가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이중 책장이라고 있습니다. 책장이 앞에 하나 있고, 바로 뒤에 책장이 하나 더 있는...말하자면 좁은 공간에 책을 두기가 아주 좋습니다. 앞쪽 책장에 바퀴가 달려서 이리저리 밀수도 있고.. 고걸로 그나마 조금 해결하고 있지요.. 마누라 등쌀은 애진작에 흘려버리고 있고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