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조지 오웰의 <위건부두로 가는 길>은 회고체를 부른다. 나 역시 한때 르뽀의 세계에 심취했던 적이 있었다. 80년대 초중반 5공정권의 폭압이 극성에 달하던 시절, 일련의 무크지를 중심으로 르뽀의 시대가 열렸다. 지금은 전설이 된 <마당>이니 <뿌리깊은 나무>니 하는 잡지들이 앞다투어 르뽀를 실었고, ‘르뽀시대’니 하는 동인들도 생겨났다. 80년대 후반에 대학에 입학한 내가 더 흥미를 느낀 것은 전시대의 그늘진 유산들이었다. 그런 책들을 통해 읽은 김현장의 ‘무등산 타잔’ 같은 소설같은 이야기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극우가 돼 버린 조갑제의 <유고>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같은 뛰어난 르뽀집들, 그리고 황지우의 반짝반짝 하는 재기발랄한 현장 르뽀르타쥬.

창비와 문지가 강제폐간된 당시에 르뽀를 통한 ‘게릴라 전술’은 일종의 ‘숨구멍’이기도 했던 듯 하다. 무크지 아니면 단행본을 통한 당대 지배질서에 대한 대항 기동전. 단행본으로 나온 유동우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이나 석정남의 <공장의 불빛>같은 노동자의 현장 수기도 그에 못지않은 감동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은 어느 헌책방 구석에 쌓여 있을 70~80년대의 목소리들은 ‘귀족노조’가 등장하는 지금의 시점에서도 여전히 생생한 감동이다. 하지만 이제 누가 이 70년대의 노동자의 현실을 기꺼워하면서 읽을 것인가. (이 시기를 다룬 강준만의 <한국현대사 산책 70년대편>이 제법 팔리는 것을 보면 당연히 지금은 ‘역사화’되어 가는 것 같다. 강준만의 ‘짜깁기로서의 역사’도 이런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대학 초년 시절, 어느 우파 교수가 사회과학적 인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박한 휴머니즘’이라는 말을 했을 때, 나는 그의 말에 십분 공감했다. 정치경제학 이전에 <전태일 평전>이 있었고, <자본론>이전에 멘체스터 방직공장을 나오는 어린 노동자를 연민으로 쳐다보던 맑스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르뽀의 재미와 감동으로 따지자면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만한 것이 있으랴. 그 책을 읽으면서 잠시 마오주의자가 되어 중국 사회주의의 거대한 뿌리를 슬쩍 만져본 것 같은 경험이 아직도 쟁쟁하다.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10일간>, 조지 오웰의 <카탈루니아 찬가> 역시 선명하다. <카탈루니아 찬가>는 아마 고종석이 당시 한겨레신문에 소개한 <스페인 내전>(형성사) 때문에 읽었을 것인데, 반파시즘 국제연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라는 감격스런 깃발 아래서 벌어지는 사상투쟁과 내부분열이 참담했다. 후일담 문학이 지배하던 당시의 지리멸렬한 풍경 속에서 이런 르뽀에 코박고 ‘소설 같은 현실’에 몰입했다.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이런 옛 기억을 불러냈다. 한겨레에서 이 책의 소개를 봤을 때 나는 이것이 황석영이 썼던 ‘사북사태’ 르뽀와 비슷한 것이리라 지레 짐작했다. 궁핍과 비참의 한가운데에서 빛나는 인간적 연대감과 근육과 땀으로 삶을 일구는 자들에 대한 동경.(이것이 극단적으로 미학화되면 김훈의 문장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 ‘위건 부두’는 없었다. 이 지명에서 한창 시절 마론 브란도가 연기했던 ‘워터 프론트’에서와 같은 부두 노동자의 삶을 기대할 건 없다. 영국 북부 탄광지대 노동자의 빈곤한 삶과 곤궁이 적나라하게 나올 뿐이다. 더구나 1부를 제외한 2부는 1930년대 유럽에 유령처럼 출현한 파시즘과 그것에 사회주의가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를 설파한 ‘정치평론’이다.

‘제국의 영광’을 찾아볼 길 없는 1930년대, 조지 오웰은 극도의 궁핍과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노동계급’의 삶을 찾아 나선다. 르뽀라기 보다 한 사회학자의 현장 보고서 같은 날카로운 분석과 관찰력이 빛난다. 노동계급의 삶과 주거, 가족의 면모를 묘사하는 그의 필치는 그닥 심금을 울리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노동계급에 대한 오웰의 시선, 영국 사회에서 계급문화가 어떻게 차별화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더 눈길이 간다. ‘h' 발음을 하지 못하는 자(하층 노동계급)과 할 수 있는 자(상류층)로 구분하는 섬세한 문화적 계급구분법. 
 
오웰이 전하는 전형적인 노동계급 가정의 풍경은 정겹고 인간미가 물씬 풍긴다 : “겨울날 저녁에 차를 마시고 난뒤, 조리용 난로에서는 불꽃이 춤을 추고, 난로 한쪽에서는 아버지가 셔츠 차림으로 흔들의자에 앉아 경마 결승전 소식을 읽고, 어머니는 다른 한쪽에 앉아 바느질을 하고, 아이들은 1페니 주고 산 박하사탕 때문에 행복해하고, 개는 카펫에 드러누워 불을 쬐는 정경을 볼 수 있는 집은 정말 가볼만한 곳이다.” 영국 노동계급은 우리처럼 경제적 계급 상승을 위해 애면글면 하지 않는 모양이다. 뚜렷이 구분되는 문화적 계급구분 속에서 스스로를 위치시키는 방식의 경직된 사회적 이동성은 ‘계급정치’가 가능한 토대이리라.  


나로서는 이 책의 2부가 더 흥미로웠다. 역자가 붙인 소제목 “민주적 사회주의의 길”은 글쎄, 그렇게 타당한 제목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노동계급 앞에서 ‘이데올로기’니 ‘동지’니 하는, 우리로 치면 ‘운동권 용어’를 남발해대는 ‘사회주의자’를 비판하는 대신, 사회주의적 가치의 필요성과 가치를 전면에 내세운다. 그가 생각하는 사회주의는 “사회적인 상식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자본론>의 이론을 구현한 세계인 것도 아니고, 볼셰비키의 집단주의도 아닌 “정의와 자유”의 세계다. “모든 억압자는 언제나 그르며, 모든 피억압자는 언제나 옳다”라는 인식 아래, “진정한 사회주의자란 압제가 타도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모여서 “정의와 자유”를 외치는 것이다. 1930년대 유럽에서 “파시즘이 유럽의 절반을 장악한 지금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자살행위”다.

오웰의 사회주의는 ‘정의와 자유’라는 보편적 가치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소박(?)하다. 이 책 후반부를 지배하고 있는 정서는 유럽에서 확산되고 있는 파시즘의 위협에 대한 오웰의 위기의식이다. 그에게 사회주의는 아마도 반파시즘의 현실적 이념이자 실천적 운동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상당분량을 할애해 그같은 사회주의로 갱신하지 못하는 당대의 “사회주의자들”과 “귀족적 사회주의자들”(여기엔 버나드 쇼나 시드니 웹, 웰즈같은 사람도 포함된다.)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데 바쳐지고 있다. 이 책이 당대의 한국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면 아마도 오웰이 제안하는 사회주의의 재구성이 한국의 진보세력 반성과 성찰에 일정한 통찰을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개량한복으로 상징되는 시민운동가들, 두루마기가 보여주는 후진적인 미적 감수성, 별나고 이상한 사람들로 비치는 운동권들 등. “연합해야할 사람들은 사장에게 굽실거려야 하고 집세 낼 생각을 하면 몸서리쳐지는 모든 이들이다”라는 통찰도 그렇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 : “여기서 우리는 서구 계급 차별 문제의 진짜 비밀과 맞닥뜨린다. 그것이 부르주아로 자란 유럽인은 자칭 공산주의자일지라도 몹시 애쓰지 않는한 노동자를 동등한 사람으로 여길 수 없는 진짜 이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요즘에는 차마 발설하지 못하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꽤 자유롭게 쓰곤 하던 섬뜩한 말 한마디로 요약된다. ‘아랫것들은 냄새가 나’” ‘냄새’는 이성적, 경제적 계급 구분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전면적이고, 넘어설 수 없는 깊은 차별의 강이다. 어설픈 사회주의자, 강단 좌파, ‘학출’ 여부를 폭로하는 기제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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