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월호의 ‘진보좌파의 길’이라는 특집을 읽다가 잠시 상념에 젖다. 한 인터넷 논객은 해방이후 좌파의 궤적을 예의 그 ‘싸가지 없는 문체’로 이 잡지 한 면에 요약하더니, “자본주의 시민의 욕망과 자본주의를 벗어나려는 좌파의 욕망이 대화하고 섞이는 곳”에서 ‘희망의 근거’를 찾는다. ‘진보좌파의 길’이라 이름 붙이기에는 하나마나한 얘기다. 이게 이제는 퇴색하다못해 너덜너덜해진 주사파의 ‘대중노선’과 실천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나는 모르겠다. 욕망이라는 담론의 수사학이 덧붙여졌을 뿐, 그것은 “오래된 농담”이다. 앤더슨이 서구 좌파가 실천의 부재로 망했다더니, 한국 좌파의 실천은 여전히 앙상하다. 그 실천은 불가피하게 우원하고 더딘 대로 정책적 사고(이미지를 거부하는 좌파가 정책 말고 뭐가 있겠나)일 수밖에 없을 진대, 그럴 듯한 정책하나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무능한 좌파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다.

이 점에서 이 친구가 민노당 학출들의 ‘경력부재’를 말하는 대목은 전적으로 옳다. 그 경력은 국가를, 사회를, 조직을 제대로 움직여보고 운영해본 자들이 갖는 경험적, 암묵적 지식과 지혜일 것이다. 선험적 담론이나 이론이 아니라 현실속에서 갈고 다듬어진 실천적 정책대안 말이다. 언젠가 진보정당의 후배에게 정말로 좌파가 집권하기를 바란다면, 10년 프로젝트로 100명 유학을 보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브라질에서 가서 룰라를 배워오든지, 공교육 정상화 떠들지 말고 핀란드에 가서 교육정책을 배워오든지, 독일에 가서 사회적 시장경제를 배워오든지. 레디앙 같은 좌파 인터넷 매체의 기사에 달린 그악스럽고 모진 소위 “좌파들의 댓글 비판”을 보면 나는 할 말을 잃는다. 어떻게 저렇게 심하게 상대를 몰아부칠까, 저런 심성구조를 가진 사람들이 집권하는 세상은 얼마나 끔찍할까. (이점, 결코 대칭적이라 말할 수 없으나 수구꼴통들의 댓글에 스민 멘탈리티도 마찬가지다. MB시대, 우리는 그걸 이미 체감하고 있지 않은가.) 

또다른 글에서 전 민노총 위원장인 이갑용은 노무현, 김대중 시절의 노동운동가들이 어떻게 일신의 영달을 위해 이들 ‘우파 정권’에 투항했는지를 냉소적으로, 암울하게 들려준다. 그랬을 것이다. 가령 노동운동가였다가 한미FTA 국내대책본부장을 맡았던, 이제는 현역 의원인 홍모씨의 경우 같은 것이 대표적일 것이다. 그의 비판에 대부분 동의하면서도, 소박하게,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참여한 전직 노동운동가들이 김문수, 이재오, 권용목 보다는 낫지 않나 라는 반감도 있다. 이들에게는 적어도 “쪽팔려할 줄 아는 양심” 정도는 찾아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갑용에게 찾아와 노무현 시대의 노동정책이, 비정규정책이 잘못됐다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철학과 박사과정을 하고 있는 최원은(이 사람이 대학시절 ‘프롤레타리아 시’를 쓰던 그였던가?) 영호남 지역주의와 서울 지역주의에 대한 돌파를 주문한다. 적어도 계급적 구분선 못지 않게 지역적 구분선을 ‘현실’로서 포용한다는 점에서 과거보다 한발은 더 나아간 듯 하다. 하지만, 현재의 세종시 문제에 대해서, 아니 그 이전에 노무현의 행정수도 이전 공약에 대해서, 민노당이, 진보신당이 무슨 말을 했던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적어도 그들 내부에서는 그게 이슈화할 정치담론이라고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원이 주문하는 ‘정치적 리얼리즘’은, 그의 주장에 동의하더라도, 여전히, 앞으로도 당분간, 요원할 것이다. 참, 허망하고 안쓰럽다. 그 허망함은 오늘자 조선일보에 실린 민노당 ‘불법 후원금’(이라 경찰이 우기는)에 관한 기사가 전하는 권영길과 천영세에게 전달된 금액이 “10만원, 15만원”이라는 “팩트”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10만원, 15만원 때문에 ‘당’의 이미지와 대중적 공신력이 와르르 무너지는 현실이라니.

그래서, 한국사회에서 좌파란, 스스로 지식인이고자 하는 자들의 ‘페이퍼 담론’이다. 여기서 지식인은 고전적 의미의 지식인이라기보다 ‘좌파담론의 소비자’를 말한다. 그건 애거서 크리스티 팬클럽이나 짐모리슨 동호회와 결코 다르지 않다. 이건 비아냥도 무엇도 아니다. 담론의 소비도 사는 즐거움 중의 하나려니, 그 애호의 대상이 마르크스인들, 지젝인들, 밥 딜런인들, 진중권인들 무엇이 다를 것인가. 패배주의라는 비판도 기실은 어떤 초월적 권위를 상정한 뒤에야 가능한 비판이니, 초월도 권위도 사라진 마당에야 설득력이 없다. 누군가 내게 <르몽드디플로마티크>를 구독하라고 계속 권유를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그와의 관계를 따진다면 그쯤 구독할 수 있겠으나, 실은 너무 재미가 없었다. 나같은 좌파담론 소비자에게 ‘재미’란 무엇보다 중요한 법이니까. 물론 그 재미에는 좌파의 현실적 성취에 대한 것도 포함이 된다. 재미를 포기하면 담론의 소비도 지탱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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