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
주영하 지음 / 사계절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여름 휴가철이면 유원지마다 삼겹살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시원한 나무그늘이거나 맑은 냇물이 흐르는 시냇가라면 거의 예외가 없다. 이런 풍경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작자미상의 19세기 그림 ‘야연’(野宴)을 보면 적어도 조선 후기부터는 있었던 듯 싶다. 이 그림에서 선비와 기생들은 화문석을 깔고 앉아 ‘육적’(肉炙)을 굽고 있다.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는 “요사이 한양 풍속에 따르면 숯불에 번철을 올려놓은 다음 쇠고기를 기름·간장·계란·파·마늘·고춧가루에 조리해 구우면서 화로에 둘러앉아 먹는다”고 적고 있다. 이를 일컬어 ‘난로회’라 불렀다 한다.

난로회는 당시 흔한 풍경은 아니었다. 소가 부족해 왕실에서 도살금지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방 수령과 양반들은 권세를 이용해 소를 도살하고 육적을 구웠다. 몰래 숨어서 소주 한잔에 육적을 먹으며 기생과 추파를 나누고 있는 게 ‘야연’의 내용이다. 육적은 쇠고기를 넓게 저며서 숯불에 구워내는 것이다. 홍만선의 ‘산림경제’에서는 “우육을 썰어서 편을 만들고 이것을 칼등으로 두들겨 연하게 한 다음 대나무 꼬챙이에 꿰어 유염으로 조미해서 유(油)가 충분히 스며들면 숯불에 굽는다”라고 조리법을 소개하고 있다. 유염(油鹽)은 간장을 뜻한다.

‘미시사’(微視史)는 작고 소박한 것들을 통하여 역사적 변화를 추적한다. 민속학자 주영하씨가 쓴 ‘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는 풍속화를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당대의 삶과 음식의 변천을 살펴보고 있다. 조선시대 풍속화 23점이 분석 대상이다. 문헌사료와 달리 풍속화는 당대의 풍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때문에 왕조의 변천으로 이뤄진 보통의 역사서와 달리 생동감이 가득하다. 저자는 ‘규합총서’·‘성호사설’·‘임원경제지’ 등 음식사를 다룬 사료들을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있다.

그림을 통해 새로운 사실들을 깨닫는 즐거움도 크다. 영·정조 시대 화가 조영석이 그린 그림에는 갓을 쓴 선비들이 소젖을 짜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우유가 근대 이후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라는 상식은 여지없이 허물어진다. 조선시대에는 ‘타락죽’(駝酪粥)이라는 이름의 우유로 만든 죽이 널리 퍼져 있었다. 드라마 ‘대장금’과 달리 궁중에서는 남자들이 주방일을 도맡아 했다. 일본과의 수교 교섭 과정을 그린 안중식의 ‘조일통상장정 기념 연회도’에는 나이프와 포크가 놓여 있다. 김치가 등장하는 조선시대 그림이 없다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저자는 “그림 속에 음식이 있고 음식 속에 역사가 있다”고 말한다. 역사를 기술하는 방법도 참 여럿인 셈이다. 이 책은 도표와 연대기·사건의 반복에서 역사를 구원해내고 있다. 당대의 삶을 실감나게 복원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서의 소임에 충실하다. 이 책에서 그려진 조선은 우리가 익히 알던 ‘조선’과는 전혀 다르다. 먹거리를 통해 보니 조선시대가 더욱 손에 잡힐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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