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만들기 - 신화와 역사의 갈림길
서울대학교 인문학 연구원 '영웅만들기' 프로젝트팀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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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순신 장군을 기리기 위해 광화문 세종로에 거대한 동상을 만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동상을 세우는 대신 김훈의 소설 ‘이순신’을 탐독했다. 소설가가 그려낸 ‘고독한 무사’ 이순신은 민족의 영웅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군인이자 독재자였던 박 전 대통령은 이순신에게서 국난을 극복한 군인의 전형을 창조하려 했지만 소설가는 그에게서 죽음 앞에 선 칼잡이의 고뇌를 이끌어냈다. 역사 속의 영웅들은 후세인들에 의해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만들어진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독일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을 골라서 청소년들에게 지속적으로 가르쳐 흔들리지 않는 국민 정서의 기둥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많은 경우 영웅은 이같은 인위적 창조의 산물이다. 네 명의 역사가가 쓴 ‘영웅 만들기’는 영웅이 탄생하는 메커니즘을 해부한 독특한 역사서다. 이 책은 나폴레옹·잔 다르크·엘리자베스·무솔리니·비스마르크 등 유럽의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의 관심은 영웅이라고 불리는 유럽의 인물들 그 자체에 있지는 않다. 그들이 언제 어떤 상황에서,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영웅으로 만들어졌는가를 따져본다. 서로 다른 이순신의 형상은 후대인들이 그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려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정치적 욕망과 필요가 투사되기도 한다. 유럽인들은 왜 그들을 영웅으로 숭배했을까. 그들에 얽힌 ‘담론’의 속살을 밝혀 내는 게 이 책의 주요 목적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영웅의 탄생은 근대 민족국가의 출현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다. 영웅을 갖지 못한 민족은 역사 속에서 공동의 기억을 갖지 못함을 의미한다. 전근대 시대의 영웅들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힘과 의지를 지닌 존재였지만 근대의 영웅은 민족을 우리라는 집단으로 묶어주는 상상의 원천이 된다. 부르주아들로부터 ‘코르시카의 식인귀’라 불리던 나폴레옹은 프랑스가 영국·독일과 제국주의적 경쟁을 하던 시기에 영웅으로 떠올랐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는 ‘지상의 첫번째 처녀’에서 제국을 다스린 위대한 CEO로 부각됐다.

구한말 한국의 지식인들은 민족을 구원할 메시아로 단군에서 을지문덕·연개소문·이순신 등을 불러냈다. 과거의 인물들을 영웅화하는 것은 그들을 기억 속으로 불러들이려는 당대의 욕망이다. 북한은 김일성의 사진과 동상을 곳곳에 세워두면서 그에 관한 기억을 공유하고 전인민을 하나로 결속시킨다. 이 책의 주장처럼 영웅은 일종의 ‘미디어’인 셈이다.

저자들은 “건강한 사회란 해묵은 영웅담의 과장과 왜곡에 휩쓸리지 않은 사회”라고 말한다. 현직 대통령을 ‘사모’하는 네티즌 집단이 등장하고, 아버지의 ‘후광’에 힘입은 야당 지도자가 당권을 쥔다. 맨손으로 재벌을 일궈낸 기업가는 인기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다. 이들에 대한 열광은 곧 영웅에 대한 대중들의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인의 숨은 갈망은 바로 그 대중적 영웅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과연 그 갈망의 실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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