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일제 침략사
임종국 지음 / 한빛문화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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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3월 2일, 일제의 초대 한국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한국에 부임했을 때 그의 수행원 가운데는 4명의 화류계 여자가 섞여 있었다. 이토는 군대와 함께 일본의 ‘기생’을 한국에 들여왔던 것이다. 1894년 청·일전쟁 발발 시 일본군은 한국에 진주하면서 서울 묵정동에 70여평의 공창가를 조성했다. 이곳은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신마치’(新町)로 불리면서 8천3백여평 규모의 ‘인육시장’으로 발전했다. 일제는 “한손에 칼, 한손에 ‘코란’이 아니라 대포와 기생을 거느리고 조선에 왔던 것”이다.

친일문제 연구자로 널리 알려진 고(故) 임종국씨의 ‘밤의 일제 침략사’는 일제에 의해 시작된 한국 ‘밤문화’의 기원을 찾아 나선다. 한·일 병탄을 추진하고 군대를 진주시켜 대륙 침략의 야욕을 불태웠던 것이 일본 제국주의의 ‘한낮’의 얼굴이라면, 요정과 게이샤가 동원된 유흥문화의 잠식은 일제의 ‘밤의 얼굴’인 셈이다. 이 당시 형성된 근대적인 밤문화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기, 6·25를 거치면서 현대의 환락가로 이어졌다. 최근 정부가 대대적인 단속을 벌이고 있는 집창촌 역시 일제시대에 비로소 근대적인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

일본군 사령부가 있었던 용산에는 1908년 무렵부터 공창가가 형성됐다. 현재에도 건재한 용산의 사창가 역사는 이즈음부터 시작된 셈이다. 요정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임씨는 1887년 일본에서 건너온 이몽이 개업한 정문루가 한국 최초의 고급 요정이라고 쓰고 있다. 당시 조선은 돈벌이에 좋다고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일본 여성들이 대거 건너왔다고 한다. 정식 게이샤는 극히 드물었고 무허가 작부들이 단신으로 건너온 경우가 많았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통감정치가 시작되면서 당시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난 일본 요정에 정식 게이샤가 대거 들어왔고, 이때부터 ‘요정 전성시대’가 개막된다.

신마치 묵정동이 공창가였다면 소공동 일대, 태평로와 을지로, 청파동, 명동 일대에도 일본 매춘부들이 들끓었다. 일본 기생들이 많아지면서 일종의 게이샤 조합인 ‘권번’이 출범한다. 1920∼30년대에는 본권번·신권번·남권번 등 세개의 게이샤 권번이 3백50여명을 거느리고 있었다. 게이샤 권번의 출현으로 한국 기생들도 조합을 결성하게 되는데, 일제의 3개 권번에 대해 한국 기생들은 대정·한성·한남·대동의 네개 권번으로 재편된다. 조선인 창녀들은 1908년 경성창기조합을 결성하면서 조직화를 시도하게 된다. 임종국씨는 1930년대 무렵 일본인 1천4백34명에 1명꼴로 일본인 게이샤가 있었다면, 조선인은 4만3천여명에 1명꼴로 기생이 있었다고 전한다.

일본인 통감들은 저마다 게이샤 취향이 달랐다. 이토 히로부미의 관저는 언제나 게이샤와 건달패들로 소란스러웠다고 한다. 그는 화대로 쌀 2백가마에 해당하는 1천원을 선뜻 지불할 만큼 통큰 사내였지만, 기실 이토의 유흥비는 한국 침략으로 일제가 빨아들인 돈이었다.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수장 송병준을 비롯한 친일파의 거두들도 일제가 조성한 유흥가의 단골이었다. 송병준이 일본인 애첩 오카스를 시켜 차린 청화정은 일제 통감부 문관들 전용인 화월, 무관들이 자주 드나들던 국취루와 함께 서울의 3대 요정으로 친일파의 총본산이기도 했다.

전통시대 한국 유흥가의 주역이었던 기생들은 ‘매창불매음’(賣唱不賣淫), 곧 노래는 팔지언정 몸은 팔지 않는다라는 명예로운 관습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밤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면서 한국 기생들의 법도도 사라져 갔다. 가령, 조선의 기생들은 손님 옆에서 술을 따라주는 관습이 없었다. 일본인들이 일본 요정에서 조선 지배층을 접대하면서 기생들에게 술을 따르게 한 것이 조선 기생의 법도를 깨뜨리고 새로운 관습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창·가무 등 예인의 자질과 시·서·화에 능한 기생은 찾아보기 어려워졌고, 기생과 창녀의 구별도 모호해졌다. “전답 좋은 것은 철로로 가고, 계집애 고운 것은 갈보로 간다”는 당시의 속요처럼 일제가 조성한 유흥가 속으로 젊은 남자와 여자들이 빨려들어 갔다.

일제 말기 들어 식민지 조선 전체가 전시체제로 변하면서 조선의 유흥가는 대륙 진출을 꾀하게 된다. 국내에서 폐업한 포주·접대부·요정업자들이 대륙 곳곳의 ‘전선’으로 진출해 ‘황군’의 사기를 북돋워주는 애국적 영업으로 각광을 받았다. 일본군이 직영하는 매춘업소들도 등장했고, 조선인 포주들도 해외에 사창가를 건설했다. 일본군이 위안소를 만들면서 조선인 여자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여자사냥’이 시작된 것도 이즈음이다. 한국에 최초의 공창가를 만들었던 일제는 일본군이 진주한 전역에 걸쳐 또다른 매춘가를 건설했던 것이다.

임씨의 책은 이같은 과정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인다.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지나치게 단편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자이크처럼 펼쳐진 당대 하류문화의 풍속도로서는 모자람이 없다. 이토 히로부미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야마나시 한조(山梨半造)등 한국에 진주한 일본인 최고 권력자들이 누린 사치와 향락, 최고의 요정 중 하나인 화월의 게이샤 유키코나 한국인 기생 초옥 등 당대 밤문화 주역들이 보여주는 드라마들은 이 풍속사의 두께를 더욱 두텁게 만들어주고 있다. 일본이 36년간이나 한국을 지배한 것은 결코 무력의 우위 때문만이 아니었음을 이 책은 생생히 증거한다. 오래 전 ‘한국사회풍속야사’란 제목으로 출간됐던 이 책이 별다른 자료의 보강없이 그대로 출간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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