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정치 풍속사 - 나의 문주 40년
남재희 지음 / 민음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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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철학자는 술을 마시면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는 것을 ‘호프만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그것은 문학평론가 김현씨의 말을 빌리면 “술이 위 속으로 들어가면 말의 성감대를 움직여 사람의 입을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원로 언론인이자 정치인인 남재희씨는 술과 그 자리의 ‘말’을 즐기는 사람이다.‘호프만 콤플렉스’로 가득찬 그의 술자리는 한국 정치의 정사(正史) 뒤편에 숨은 야사(野史)의 보고다. 196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언론·정치사의 주역들은 하나둘씩 그의 술자리에 불려나와 불콰한 얼굴로 말의 성찬을 풀어 놓는다.

‘언론·정치 풍속사’라는 제목을 단 남씨의 책은 지난 40년간 교유했던 인사들과의 취중 진담을 기록해 놓은 책이다. 남씨는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정치부장·논설위원과 서울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한 언론인이자 1979년 10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 4선을 기록한 관록의 정치인이다. 언론계와 정치권을 두루 섭렵했던 남다른 이력은 그의 술벗들의 면면을 짐작하게 한다. 전직 대통령을 비롯한 거물급 인사만이 아니라 고급 살롱의 마담에서부터 사회운동가에 이르기까지 그의 술벗들은 풍성하리 만큼 다양하다. 그는 이들과 더불어 보낸 술집 행각을 일컬어 ‘사회학적 순례’라고 부른다. 술을 통한 한국 사회의 풍속 탐구라는 뜻이겠다.

남씨는 두주불사형의 애주가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고백하듯이 ‘호사가’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는 재미 중 하나는 굵직한 인물들의 됨됨이를 짐작케 하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이다. 화장실에서 만난 박정희 대통령이 소원 한가지를 말해보라고 하자 “공장에 가보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을 피력하는 선비 언론인 송건호씨, 촌지를 받지 않았다는 30년 전의 기억을 컴퓨터처럼 떠올리는 김대중 전 대통령, 술집에 홀로 와서 술잔을 기울이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살롱계를 주름잡던 마담들과 그들에 얽힌 이야기 등 그의 ‘문주(文酒) 40년’의 일화들이 아라비안나이트처럼 펼쳐진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을 각각 검도와 축구의 주장, 테니스에 비유하는 재치도 눈길을 끈다.

그는 “대폿집을 갈 줄 아는 정치 지도자. 나는 그런 지도자를 바란다”고 말한다. 근엄한 얼굴로 국가와 민족만을 말하는 금욕주의자는 인간적 깊이가 그만큼 옅다는 얘기다. 고은 시인은 남씨를 “의식은 야에 있으나/현실은 여에 있었다/꿈은 진보에 있으나/체질은 보수에 있었다//시대는 이런 사람에게 술을 주었다”고 읊고 있다.

이 책에서 느껴지는 남씨의 인간적 깊이는 권력의 정점인 대통령에서부터 보수 정치인, 그리고 권영길과 같은 진보 정치인을 아우를 만큼 넓고도 깊다. 지난해에는 여야 3당 대표가 룸살롱에서 7백만원짜리 폭탄주 파티를 벌여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이런 시대에 빈대떡집에서 정계와 언론계의 거목들이 소주를 마시는 남씨의 술자리는 ‘전설’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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