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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山이 낫다
남난희 지음 / 학고재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산 속으로 들어서면 산을 볼 수 없다. 그동안 산에 오르기는 했으나 산을 볼 줄 몰랐다. 산 아래에서 생활하다 보니 이제야 산이 보인다. 그동안의 산이 항상 목마른 열망 덩어리였다면, 이제 비로소 편안한 산을 만난 것이다. 그동안의 산은 나를 알피니스트로 선택했지만, 그 이후의 산은 나를 생활인으로 선택해 주었다. 산을 버려 산을 얻었다.”
남난희씨는 1984년 백두대간 단독 종주에 성공한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 산악인이다. 1986년 여성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해발 7천4백55m의 히말라야 강가푸르나 봉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이제 높은 산을 버리고 낮은 산으로 내려와 소박한 농사를 짓고, 차를 만들며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정상 정복을 꿈꾸는 알피니스트가 아니다.
‘낮은 산이 더 낫다’는 지리산 화개골에서 살아가는 남난희씨의 ‘산거일기’(山居日記)다. 산악인이었을 때 그녀는 숨가쁘게 산을 올라갔던 열정의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높은 산에 오르고 정상을 정복했으면서도 극도의 허무감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그녀에게 등반은 ‘죽음의 대리선택’이기도 했던 것. 그 와중에 그녀는 “산은 도전의 대상”이 아니고, “인간이 자연에 도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 그녀는 서슴없이 산 아래로 내려와 거기서 삶을 일궜다.
처음에 그녀가 정착한 곳은 지리산 청학동. 거기서 그녀는 계절이 바뀌는 것을 몸으로 느끼며 더 이루겠다는 욕심도, 더 가지겠다는 욕심도 접고 초연하게 살았다. 그 뒤 아이 하나만 달랑 데리고 정선으로 옮겨와 정선자연학교를 운영하기도 했다. 차를 따고 덖고 비벼 만들기도 하면서 삶의 실감을 온몸으로 느끼며 산다.
그녀의 산문은 어느새 시골의 중년 아낙으로 늙어가는 한 여성이 두런두런 풀어놓는 삶의 이야기다.
“오래된 나무를 보면 존경스럽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보내면서도 어찌 저렇게 당당하고 편해 보일 수 있는지, 어쩌면 한자리에서 저리도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지. 얼마나 자신을 비운 삶이기에 저렇게 넉넉할 수 있는지 그래서 그들이 부러운 것이다. 그들을 닮고 싶은 것이다.”
짐작했다시피 이 책에는 ‘왕년’을 회고하는 산악인의 무용담이나 모험담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시골로 들어가 ‘소박한 밥상’을 실천하며 살아갔던 스콧 니어링·헬렌 니어링 부부의 삶이거나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그것과 닮은 이야기일 뿐이다.
숨가쁜 일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도시민이 선뜻 선택할 수 없는 그런 삶 말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이 일종의 마음의 산책이라면, 이 책은 그 산책의 도반(道伴)으로서 매우 적절하다. 산꼭대기에 올라가 본 사람들은 저자의 통찰에 아마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산을 내려와야 산이 보인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