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지식인들과 한국전쟁
정명환 외 지음 / 민음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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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한반도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하면서 프랑스에서는 총성없는 전쟁이 치러지고 있었다. 세기의 철학자들인 장 폴 사르트르와 모리스 메를로 퐁티, 그리고 레몽 아롱·알베르 카뮈 등 거장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과연 무엇이 이 거장들을 이역만리에서 벌어진 전쟁에 대해 심각한 논쟁의 소용돌이로 밀어넣었을까.

프랑스는 드레퓌스 사건 이래 지식인의 현실 참여가 하나의 전통으로 굳어졌다. 한국전쟁 논쟁은 이런 전통의 연장선에서 벌어졌다. ‘프랑스 지식인들과 한국전쟁’은 이 논쟁을 본격적으로 다룬 국내 서적으로는 첫번째 책이다. 한국의 불문학자들과 프랑스 학자들이 공동으로 참여해 펴낸 것으로, 책의 주요 내용은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 등 철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다. 이 책은 전쟁이라는 폭력에 대해 지식인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한 ‘진보적 폭력’은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심각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2차대전 종전 이후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상황은 한국의 해방 이후 사정과 비슷했다. 냉전체제가 시작되면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 ‘진영’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아야 했고, 또 기꺼이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2차대전 중에 ‘사회주의와 자유’라는 레지스탕스 단체에서 함께 활동하고, 전후에는 그 유명한 ‘현대’(les temps modernes)지를 창간한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서서히 결별하게 된다. 옛 소련과 공산주의에 경도돼 있던 사르트르는 초기 남한의 북침설을 전폭 수용하더니 급기야는 북한이 남한과 미국의 의도에 휘말려 남한을 공격하게 됐다는 ‘해석’을 내세웠다. 사르트르는 ‘혁명적 유토피아주의’였고,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한 것이었다.

메를로 퐁티는 소련에서 벌어진 정치적 탄압과 폭력을 보면서 마르크스주의자에서 탈피하게 된다. 또 다른 거장 아롱은 한국전쟁을 지켜보면서 미국쪽에 경도됐고 결국 공산주의 비판자·우파 철학자로서 확고한 입장을 취하게 된다. ‘이방인’의 작가 카뮈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시켜선 안된다”는 논리를 펴며 공산권에서 자행되고 있는 폭력에 대한 반대 견해를 폈다. 이념과 논리의 차이는 한때 동지이자 절친한 벗이었던 이들을 갈기갈기 쪼개놨다. 저자들은 여기서 아롱과 메를로 퐁티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진보적 폭력’에 대해서도 은근히 비판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이 논쟁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물론 그것은 지금 점점 악화되고 있는 이라크 상황 때문이다. 당초 미국이 전쟁 개시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대량살상무기도, 민주주의와 인권의 확대라는 논리도 설득력 없음이 밝혀지고 있다.

미국적 가치를 심기 위해 전쟁을 벌인 네오콘의 논리와 이념적 가치를 위해 폭력을 정당화했던 사르트르의 입장은 묘하게도 유사하다. 그럼 한국의 지식인들은? 한국전쟁을 두고 치열한 논리 대결을 벌였던 프랑스 지식인들과 달리 한국은 너무 조용하다. 상황이 너무 명백해서일까, 지식인들의 지적태만 탓일까. 이래저래 이 책은 음미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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