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망명지
유종호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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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고은은 문학평론가 유종호에 대해 이런 시를 남겨 두고 있다. “그런데 그의 공부는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착실했다/젊은 날/토마스 만을 다 익혀/조심스레/루카치를 익혀/… (중략)…/시 음악 그리고 산에 깊이 귀의해/책에 귀의해/여기 조선의 중도(中道) 지식인 있다/나이 들수록 자신만만과 허망이 번갈아가며.” 유종호는 어린시절인 일제 말기부터 일흔을 바라보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쉼없이 책을 읽어온 독서가이자 지금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현역’ 비평가다. 그의 산문집 ‘내 마음의 망명지’는 한국 인문주의가 다다른 어떤 지극한 경지를 보여준다.

그에게 ‘책’은 즐기고 감화를 받기 위한 매체이면서 세상에 대한 균형감각을 길러주는 지혜가 담긴 우물이다. 그는 책을 통해 얻은 지식과 통찰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고 믿는다. 정치인의 무분별한 당적(黨籍) 이동을 두고 ‘정치철새’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자 그는 시인 월리스 스티븐스의 ‘지빠귀를 보는 열세 가지 방식’이라는 시를 꺼내든다.

거기에 “높이 북으로 날아가는 기러기에 창자가 끊어질 듯하다”는 두보의 시 ‘귀안’(歸雁)과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는다”는 정지용의 ‘고향’이 슬쩍 기어든다. 그는 철새 정치인이라는 말속에서 언어의 오염과 정치적 타락을 본다. “(철새는) 매임없는 자유의 이미지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날개였다.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의 하나가 정치적 비행과 연루됨으로써 오염되고 훼손되었음을 필자 역시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의 생각은 ‘교양’을 통해 사회적 무질서를 넘어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영국의 문명비평가 매튜 아널드에 가깝다. 문학과 책을 통해 현실을 비춰보면서 반성하는 것, 그게 바로 저자가 생각하는 인문주의의 힘이다. 그래서 그는 유난히 고전에 천착한다. 이 책에는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사르트르와 레비 스트로스의 저작들, 한국 작가로는 시인 정지용과 평론가 김동석이 자주 등장한다. 그가 생각하는 ‘고전’은 세월의 풍화작용을 견뎌낸 작품들이다. 오랜 세월을 거치고도 살아 남은 것들이야말로 읽고 음미할 만한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산문집에는 수많은 인용문이 등장한다. 그 인용들은 꽤나 정확하고 적절하다. 민주주의의 폐해에 대해서는 “거리의 장삼이사(張三李四)가 베토벤의 어깨를 치며 ‘노형, 안녕하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민주주의는 아니다”라는 토마스 만의 말이 등장한다. 사랑에 대해서는 “아들아, 여인의 사랑을 조심하려무나. 저 황홀과 완만한 독약을”이라는 소설 ‘첫사랑’의 한 대목을 끌어온다. “새로 얻은 권력은 언제나 가혹하다”는 에우리피데스의 경구도 “제자리에 놓인 적절한 말”이다. 여기 등장하는 인용문과 예화들은 저자가 허투루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문학평론가로서 저자는 현실의 부침(浮沈)에 따라 성쇠를 거듭해온 이른바 순수문학에도, 참여문학에도 가담하지 않은 채 독자적인 인문주의 비평의 길을 걸어 왔다. 그는 인문주의자답게 언어, 특히 한국어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무미건조한 대개의 평문들과 달리 저자의 문장은 꼼꼼히 되씹을수록 맛이 살아난다. 그는 83세에 시집을 낸 미국의 한 여성시인과 80대에 그리스어를 익혀 소크라테스 연구서를 낸 저널리스트 I. F 스톤에 대해 ‘장엄한 노인들’이라는 헌사를 보내고 있지만, 정작 찬사에 어울리는 사람은 바로 그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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