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의 탄생
이강숙 지음 / 현대문학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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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는 ‘성장소설’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불린다. 한 예술가가 외부적인 모험과 내적 갈등을 겪으면서 정신적 성장을 이루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예술가의 정신적 성숙 과정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강숙 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가 쓴 소설 ‘피아니스트의 탄생’은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피아니스트인 이교수는 한국의 가장 대표적인 음악 학자이면서 음악 교육가이기도 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을 지내며 이 학교를 최고의 독립 예술교육기관으로 만든 인물이 바로 이교수다. 그는 “평생 음악선생으로 살아오면서 ‘피아노 교육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며 이 소설은 음악 교육에 관한 것이라 자평했다.

‘피아니스트의 탄생’은 한국 소설 가운데 가장 희귀한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저자가 우선 문학과 음악이라는 이질적인 장르를 넘나들며 르네상스적인 예술가의 면모를 보여줬다는 게 그렇다. 게다가 이 책은 전례없는 음악 교육에 관한 소설이다. 한국의 극성스런 부모들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아이들을 피아노 학원으로 내몬다. 부유층 일부에서는 일찌감치 아이들을 외국의 유명 음악 교육기관에 조기 유학을 보내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교육 현장에서 40여년의 세월 동안 음악을 가르쳐온 이교수의 소설은 그런 풍조에 따끔한 충고가 될 듯하다. 작가는 진정한 음악가가 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지 차근차근 풀어놓는다.

소설의 첫머리는 한 지방도시 소시민층 가정에서 태어난 주인공 민영이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스승들을 찾아 나서는 장면이다. 주인공의 배후에는 ‘재야 피아니스트’인 한 노인이 있고, 그를 피아니스트로 훈련시킨 사람들은 네명의 스승들이다. 첫 스승은 피아노를 사랑하게 하고 피아노와 친숙하게 만들어준 사람이고, 두번째 스승은 피아니스트로 훈련시켜 콩쿠르에 나가도록 하는 인물이다.

세번째 스승을 만나 혹독한 훈련을 받지만, 국내의 ‘음악권력’ 때문에 콩쿠르에서 입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네번째 스승은 이제까지의 스승들이 가진 장점을 고루 갖춘 사람. 그를 만나 비로소 주인공은 음악가로 성공을 거둔다. 주인공의 성장 과정을 지켜본 재야 피아니스트는 그에게 “세계무대에서 팔리는 상품이 되지 말고 자기의 예술혼을 찾아 그 혼과 평생을 같이할 것”을 당부한다.

다른 성장소설처럼 이 소설 역시 ‘스승’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물론 최종적인 것은 자신 내부의 예술혼과 주체의식이다. 이는 고희를 눈앞에 둔 음악계의 거장이 오늘의 한국 음악계에 던지는 화두이기도 하다. ‘교육소설’이라고 해서 재미가 없을 거라 예단하지 말라. 저자는 문필력을 인정받아 이미 몇해 전 정식으로 등단했다. 현대소설가들의 버릇처럼 구성을 복잡하게 하거나 알듯말듯한 문장들을 늘어놓지도 않는다. 음악가로 살아온 그의 평생처럼 이 소설은 담백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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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바리 2011-08-03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재 태그'에서 '피아니스트'가 있길래 저는 혹시 로만 폴란스키 영화 리뷴가 했네요..^^ 암튼 이분이(잘 모르지만) 이런 보기드문 소설까지 쓴 걸 알았군요.. "예술가의 정신적 성숙 과정"을 보여주는 교양소설은 유럽엔 괴테나 토마스 만이 있지만, 우리 사회에선 참 희유한 것 같습니다. 이문열의 몇몇 소설이 판에 박으나마 구색을 좀 갖추려 한 것 같고, 그뒤엔 뭐 있었나요? 음악 쪽은 더욱이나 기대하기 어려운듯 합니다. 클래식에 취미붙인답시고 한창 폼잡을 땐 남좋다는 피아니스트라면 무조건 다 귀동냥하기 바빴는데도 여전히 귀는 잘 트이질 않는군요..^^ 영화 <피아니스트>에 나온 쇼팽곡은 루빈스타인 것으로 어쩌다 듣는데, 그나마 익숙한 경우지요.. 또, 무려 74세의 고령으로, 영화 <샤인>에 나왔던 라흐마니놉의 '악마의 곡'을 기막히게 쳐낸 호로비츠도 어쩌다 '전율'이 필요할 땐 듣습니다..^^

모든사이 2011-08-03 08:34   좋아요 0 | URL
이강숙 선생의 소설은 그 뒤로 민음사에서 나온 <빈병교향곡> 정도를 더 읽었는데, 아주 완미한 단편들이더군요. 오랜 세월 숙성을 거친 문장이랄까요.. 서사가 그리 재밌다거나 스펙터클하진 않지만, 품위있게 나이든 분의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쪽에서의 고급은 저쪽에서의 고급이 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