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의 노래 - 칼의 노래 100만부 기념 사은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소설가 김훈(56)은 요즘 그의 애마 ‘풍륜’을 끌고 한강변에 나간다. 그가 살고 있는 일산에서 바라본 한강 하구의 풍광은 드넓은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풍륜’은 그의 몸을 싣고 전국을 누볐던 자전거다. 그는 이 자전거를 끌고 한반도 남단을 구석구석 답사하며 거기에 스민 삶의 사연들을 모아 ‘자전거 여행’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두어 평 남짓한 그의 작업실에는 한강과 관련된 각종 자료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취재수첩을 들고 거리에 서 있었던 현장기자였다. 3년 전에는 틈 날 때마다 아산 현충사에 가서 이순신 장군의 칼을 들여다봤다. 그에게 ‘동인문학상’을 안겨준 ‘칼의 노래’는 그렇게 탄생했다. 지난해에는 예술의 전당 악기박물관에서 하루종일 악기를 들여다보는 일로 하루를 보냈다. 최근 출간된 장편 ‘현의 노래’는 “악기들 내면의 맹렬한 적막에 관하여” 쓴 작품이다. 오랜 발품 끝에 작품을 얻어내는 그의 버릇대로라면 아마도 그의 다음 작품은 ‘한강’에 관한 것이 될 지도 모른다.

김훈은 요즘 소설가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는 최근 처음 쓴 단편소설 ‘화장’으로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1995년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을 발표하며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미문을 자랑하는 에세이스트로서 이름을 날렸다. ‘한국일보’ 기자, ‘시사저널’ 편집국장, ‘한겨레’ 부국장급 현장기자 등 30여년 동안 여러 언론사를 전전했던 그는 문장력에서 당대 제일 가는 산문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기자생활을 접고 마흔을 훌쩍 넘어 소설가의 길로 나선 지금 그는 단 네 편의 작품으로 최고의 작가 자리에 올라 있다. 문학평론가 김인환은 “김훈은 장편과 단편의 첫 두 편으로, 당대의 가장 으뜸가는 두 문학상을 석권한 최초의 작가이며, 어쩌면 앞으로도 좀처럼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전무후무한 기록을 오래 보유하게 될 지도 모른다”고 평가했다.

그의 장편 ‘현의 노래’는 2001년 발표된 ‘칼의 노래’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작품이다. 후자가 임진왜란 당시의 무장(武將) 이순신을 다룬 것이라면, 전자는 가야의 악사(樂師) 우륵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그의 사유는 3년여 세월 동안 ‘무기’에서 ‘악기’로 이동한 것이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전쟁과 살육이라는 공통된 배경 위에 서 있다. 이순신은 전쟁영웅이었고 우륵은 신라가 가야를 정복하기 위해 무참한 살육전쟁을 치렀던 시대의 인물이다. 김훈은 말한다.

“무기가 추악한 것이고 악기가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 둘은 세계를 이루는 거대한 두 축이다. 살인의 도구와 아름다움을 실현하는 도구가 모두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는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통념을 뒤집어 ‘무기’가 가진 현실적 힘을 긍정한다. 동시에 ‘악기’ 역시 이전에는 실존하지 않았던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현실을 창조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고 본다. “잠든 악기 앞에서 그 악기가 통과해온 살육과 유혈의 시대를 생각하는 일은 참담했다. 악기가 홀로 아름다울 수 없고, 악기는 그 시대의 고난과 더불어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을 뿐이었다.”

“대의명분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보자면 가야의 악사 우륵은 ‘배신자’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허물어져가는 조국 가야를 배반하고 가야금과 자신의 제자 니문을 데리고 신라에 투항한 인물이다. 그를 두고 김훈은 ‘찬란한 배반’이라고 말한다. “소리는 인간이 살아서 귀로 그것을 들을 수 있어야만 의미가 있다. 죽으면 음악이 있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생명이 조국보다 더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예술가다.”

김훈은 대학시절 ‘삼국사기’에서 우륵이 가야금을 들고 신라로 도망갔다는 대목을 읽는 순간 서늘한 감동을 느꼈다고 했다. 이순신은 정사(正史)에서 말하듯 구국의 영웅이 아니라 불가피하게 살육을 감행해야 했던 ‘고독한 무사’다. 김훈은 이순신이나 우륵처럼 한가지 목표를 위해 삶의 모든 것을 내건 ‘순결한’ 인물들을 동경한다. 그는 자신이 ‘완벽한 테러리스트’라고 평가하는 안중근을 좋아한다.

그에게 이상문학상을 안겨준 ‘화장’은 화장품 회사의 간부로 있는 중년 사내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의 아내는 뇌종양으로 죽어가고 있고, 그가 연정을 품고 있는 여성은 자기 회사의 젊은 부하 여직원이다. 병에 걸려 밤낮으로 똥과 오줌을 싸는 아내는 그가 처한 비극적 현실이고, 싱싱한 육체와 젊음을 자랑하는 여성은 그가 실현하고픈 욕망의 대상을 뜻한다. 그 사이에 서 있는 주인공은 전립선염으로 고통받고 있다. 삶은 비극적인 것이지만 욕망의 실현은 더더욱 어렵다는 김훈식 허무주의가 짙게 깔려 있는 작품이다.

삶에 대한 그의 허무주의는 전작 ‘칼의 노래’와 이번 ‘현의 노래’에서도 줄곧 관통하는 주제다. 비극적 현실과 추악한 욕망 사이에서 ‘전립선염’을 앓으며 견디는 것,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인간의 한 생애다. 김훈은 자신이 ‘심한 마초’이며 ‘실패한 기자’고 ‘지독한 보수주의자’임을 숨기지 않는다. 시사저널 편집국장 재직시 한 대담 자리에서 ‘반페미니즘 발언’을 했다가 부하 기자들의 항의를 받자 서슴없이 직장을 때려치웠다.

군사독재 시절 자신이 독재자를 찬양하는 ‘용비어천가’를 썼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지난 대선 때는 이회창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그는 노무현 정부의 등장은 “그저 공차는 것일 뿐인 월드컵 바람에서 비롯됐다”고 믿는다. ‘축구공’이 세상을 바꾸는 것을 보고 그는 자신의 시대가 끝났음을 절감해 대선 직후 스스로 ‘한겨레’에 사표를 냈다. 김훈은 조만간 자신이 기자로서 살아왔던 시대를 작품으로 쓸 계획이다. 그는 기자로서의 자신은 실패했다고 말한다. “내가 기자생활을 했던 그 시대 전체가 실패작이다. 그렇다면 그 시대의 기자였던 나 역시 완전히 실패한 삶이 아닌가.” 그 스스로 다음 작품은 실패한 자의 ‘후일담’이라고 예고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해 방송의 한 독서 프로그램에 나와 김훈의 장편 ‘칼의 노래’를 추천하며 “뭐라 할 말이 없다. 놀랍다”는 평가를 내렸다. 노대통령은 ‘놀라움’의 근거를 제시하진 못했으나 한가지는 분명하다. 삶에 대한 김훈의 시선은 냉정할 정도로 정직하다는 것이다. 김훈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배설물의 냄새를 풍기며 추악하게 죽어간다. 김훈은 우륵의 죽음을 “오줌이 흘러 두 다리를 적셨다”고 묘사한다.

이런 비루한 죽음의 묘사는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의과대 교수와 수련의들을 만나 직접 인터뷰해 얻어낸 것들이다. 지독한 허무주의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유에 일정하게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사실’에 대한 집요한 탐구 때문이다. 일산에 있는 그의 집에는 ‘현의 노래’의 배경이 되는 경남 창녕·고령 일대의 상세지도가 벽에 걸려 있다.

그는 자전거를 끌고 가야의 흔적을 찾아 그 지역을 일일이 답사했다. 가야의 냄새는 찾을 길 없었으나 우륵이 바라봤던 신라 시대의 ‘별’은 그때나 지금이나 반짝이고 있었다. 김훈은 자신을 실패한 기자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소설이 가진 냉정한 정직성이라는 미덕은 현실을 직시해야 했던 기자생활이 남긴 유산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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