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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동 천자문 - 하늘의 섭리 땅의 도리
김성동 쓰고 지음 / 청년사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할아버지는 다섯살 난 손자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며 충청도 사투리로 이런 말을 남겼다. “문즉인(文則人)이라…, 문즉인이요 문긔서심(文氣書心)이라… 글은 곧 사람이라. 글은 곧 긔요 글씨는 곧 마음이니, 다다 그 긔를 똑고르게 모으구 그 마음을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넌 사람만이 글을 짓구 또 글씨를 쓸 수 있너니…” 소설가 김성동은 조부 앞에 정좌하여 천자문을 배우던 자신의 다섯살 시절을 떠올리며 1천자의 글씨를 하나하나 써내려 갔다. 한구절 한구절 스민 뜻을 새기고 거기에 ‘군말’을 붙여 자신만의 ‘김성동 천자문’을 펴냈다.
‘천자문’은 중국 남북조시대 양나라의 문인 주흥사(周興嗣)가 펴낸 것이라고 한다. 죽을 위기에 처한 주흥사에게 왕이 “하룻밤 안에 1천자로 사언절구의 문장을 만들면 죄를 용서해 주겠다”고 명령했고, 주흥사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천자문을 지어냈다고 한다. 하룻밤새 그의 머리칼은 새하얗게 변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 후 ‘천자문’은 한자에 입문하려는 모든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배워야 하는 교재가 됐다. 우리나라에는 백제 때 전래됐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조 명필이었던 한석봉의 ‘석봉천자문’이 가장 유명하다고 한다.
김성동은 ‘만다라’로 이름난 소설가이자 한학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다. 그는 이 책의 글씨 1천자를 손수 쓰고 거기에 ‘하늘의 섭리 땅의 도리’라는 이름을 붙였다. ‘천자문’에는 중국의 역사와 함께 천문과 지리, 제왕학과 정치가의 도리, 인간 사이의 예의범절 등이 모두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과 매체의 발달로 말이 홍수를 이루고 있는 시대에 1천개의 글자 안에 세상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는 발상은 시대착오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글을 숭상하던 봉건시대의 ‘숭문주의’에나 어울릴 법하다. 그래서인지 ‘천자문’은 필수교육에서 빠진 지 이미 오래다.
하지만 저자 김성동은 지나치리 만큼 진지하다. 그가 정성들여 쓴 1천자도 그러하고, 거기에 붙인 자신의 ‘군말’도 그렇다. ‘일월영측 진수열장’(해와 달은 차고 기울며 별과 별자리들은 고르게 펼쳐져 있다) 여덟 글자를 써놓고, 굶주리던 어린 시절 자신이 동경에 찬 얼굴로 올려다보던 하늘의 별을 떠올리면서 “별무리가 총총 박혀 있는 저 밤하늘이 우리가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일 수 있었던 시대”를 말하는 헝가리 문학평론가 루카치를 상기하는 식이다. 한 글자를 ‘화두’삼아 오랜 시간 곱씹고 묵힌 사유를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김성동의 ‘천자문’이 주는 미덕도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말의 경건성’을 그는 자신의 글씨와 사유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