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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건축과 뉴 휴머니즘
임석재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3년 11월
평점 :
강원도 정선과 스페인의 빌바오는 둘 다 탄광도시였다. 죽어가던 두 도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시 태어났다. 한국은 정선을 살리기 위해 카지노를 지었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빌바오를 살리기 위해 세계적인 건축가 프랑크 게리에게 의뢰, 구겐하임 미술관을 세웠다. 결과는 어땠을까. 정선에는 돈과 도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도박꾼들로 넘쳐났다. 반면 빌바오는 전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건물을 보기 위해 찾아들었다. 정선에는 몸과 마음이 피폐한 자들과 죽은 돈들이 넘치지만, 빌바오에는 건축예술을 감상하려는 사람들과 그들의 건강한 돈이 모여드는 곳이 됐다. 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서양건축사와 전통건축에 관한 다수의 역저를 펴낸 바 있는 임석재 이화여대 교수는 건축을 그저 돈으로만 바라보는 한국의 ‘문화적 불모성’이 정선을 죽은 자들의 도시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가 새로 펴낸 ‘현대 건축과 뉴휴머니즘’은 한국의 반문화적인 건축 현실을 예리하게 진단하는 건축비평서다. 빌바오의 성공은 임교수가 말하는 ‘건축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정선의 카지노를 짓는데는 2천3백억원이 들어갔지만 빌바오의 미술관은 그보다 훨씬 적은 1천7백억원밖에 들지 않았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건축을 문화예술로 바라보지 못하는 인식이 문제인 것이다.
건축을 문화예술로 되살리는 것은 “성장과 효율과 경제성이라는 한가지 기준”에 의해 폐기됐던 가치를 복원하는 일이다. 임교수는 이를 “기계 물질문명과 산업자본주의에 의해 파괴된 인간성을 되찾는 일”이자 ‘뉴휴머니즘’을 세우는 작업이라고 강조한다. 영국의 아파트 수명은 1백30년, 미국은 1백년이지만 한국의 그것은 20년이다. 저자가 말하는 건축의 뉴휴머니즘은 끝없는 파괴의 악순환을 끊는 작업이다. 동시에 건축을 투기대상으로만 생각하는, ‘싼값에 빨리’ 짓는 압축근대화의 폐해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것은 한옥 등 전통건축이 가진 미덕을 재해석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대학교수인 저자는 방학 때마다 한두달씩 세계의 도시를 누비고 다닌다. 유명 건축물만이 아니라 삶의 현장으로서의 건축물을 보기 위해서다. 이 책은 건축에세이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기실은 발냄새가 밴 현장 르포집이기도 하다. 그의 예리한 시선은 코엑스몰과 신촌의 대학가뿐 아니라 유럽의 도시들과 맨해튼의 빌딩숲, 캘리포니아의 현대 건축에까지 가 닿는다.
인간의 자리가 사라진 건축은 그저 싸늘한 콘크리트 더미에 불과하다. 우리는 기후에 맞게 경상도는 ‘ㄷ’자형, 전라도는 ‘ㅡ’자형 집을 짓고 살았다. 전국의 모든 집이 아파트로 표준화된 지금 그런 지방적 차이는 사라졌다. 똑같은 집은 집이 아니다. 이 책은 사람이 살아가는 집을 되찾기 위한 건축학자의 고투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