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 사랑과 사회
정이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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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의 소설에는 화장하는 여자들이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그녀들은 “샤넬 립스틱 번트 레드”를 바르다 남편의 죽음을 전해듣지만 태연하게 “윗입술을 마저 바르고 검은색 투피스를 꺼내 입은 다음” 114에 전화를 건다. 혹은 정부를 꽃병으로 내리쳐 살해한 뒤 “클렌징 크림을 덜어 이마와 눈두덩, 뺨과 입술까지 가볍게 마사지한 뒤 화장솜으로 차근차근” 닦아낸다. 천연덕스럽게 화장에 몰두하는 그녀들은 악마적이기까지 하다. 

 

화장은 일종의 위장술이다. 그녀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위장술에 능하다. 표제작에서 미국 로스쿨 출신의 부잣집 막내아들과 결혼을 꿈꾸는 여성이 내세운 자신의 연애 ‘컨셉트’는 청순함이다. 그녀는 섹스를 하기 직전, 샤워는 혼자서 남자보다 먼저 하라, 은은한 화장을 하라, 엉덩이를 들지 말라, 머리를 촉촉하게 적셔라 등의 경구를 되새기며 남성적 시선이 요구하는 청순함을 ‘연기’한다. 정이현의 소설에서 사랑은 탈낭만화되고, 남성적 위선은 가볍게 전복된다.

이 신인 여성작가의 첫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는 여덟편의 단편을 싣고 있다. 그녀의 소설이 가진 새로움은 앞세대 여성 작가들과 비교했을 때 더욱 또렷하다. 은희경이나 전경린 등 앞세대 여성 작가들은 관습화된 사랑과 결혼에서의 일탈을 꿈꾸는 여성들을 통해 ‘여성적 욕망’을 전면화시킨 바 있다. 하지만 정이현 소설의 여주인공들은 훨씬 더 노회한 ‘팜므 파탈’들이다.


전세대가 낭만적 사랑과 일부일처제라는 신화를 해체하는 작업에 몰두했다면, 그녀는 섣부른 해체와 혁명을 꿈꾸지 않는 대신 그 안에서 안락한 삶을 구가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그 방법이 바로 화장의 기술, 곧 위장술이다. 어차피 세상은 가짜들로 이뤄진 곳이다. “진정으로 강한 여자”가 되기 위해선 마치 짝퉁처럼 ‘진짜 같은 가짜’가 돼야 한다는 게 그녀가 제시하는 사랑의 ‘정치학’이다.

정이현 소설의 여주인공들은 명품을 걸치고, 압구정동 거리를 활보하며 깔깔거리는 2000년대의 여성들이다. 요즘 여자들의 생리를 그려내는 작가의 문장은 시니컬하면서도 단정함을 잃지 않고 있다. 신인이면서도 소설을 맛깔스럽게 이끌어가는 솜씨와 ‘물건’을 만들 줄 아는 내공이 만많치 않다. 그녀의 소설을 통해 최근 한국 사회의 풍속도를 그려볼 수 있다면, 확실히, 요즘 여성들은 더 무서워졌다.

 

“강북 필”이 나는 오빠와의 로맨스를 위해 “폴로 랠프 로렌의 니트 스웨터”를 입고 ‘여우짓’을 실행하는 16세 소녀는, ‘미소녀 헤어누드’를 찍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부모를 상대로 가짜 납치극을 벌인다. 그녀들은 남편과 정부를 죽이거나 남자의 사타구니를 걷어차 버린다. 호주제 폐지 공청회가 양반을 자처하는 인사들에 의해 난장판이 되는 세상이지만, 한국의 여성 소설은 당분간 이런 나쁜 여자들이 지배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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