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문비 탁자 나비클럽 소설선
공원국 지음 / 나비클럽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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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비 탁자>는 한국어로 쓰여진 티벳 다큐멘터리 같다. '초모랑마'나 '실크로드'를 다룬 티비 다큐멘터리 속의 티벳은 문명의 검은 손길이 닿지 않은 전통적 삶의 방식이 유지되는 곳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 곳에서는 '문명'에 물들지 않는 '착한 사람들'이 산다. 이런 티벳에 관한 시각도 어쩌면 또다른 의미의 오리엔탈리즘 일 수도 있겠다. 우리들의 삶이 이미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졌으니, 그나마 아직 '순수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곳이 위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도, 중앙아시아, 티벳, 몽골, 부탄과 네팔에 대한 이상한 동경에는 이런 순수에의 욕망이 바닥에 깔려 있다. 거기에서 우리가 상정하는 순수가 보장되지도 않을 것이고, 실제로 그렇지 않을 테지만(가보지 않았으니 어찌 짐작이나 하겠는가마는), 이 지역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오랫동안 지속적인 인기를 끌고, 간헐적으로 방영되는 이유는 그 욕망이 제법 광범위하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왜 이 소설이 다큐멘터리 같다고 느꼈는가. 그것은 소설의 배경이 되고 있는 지역의 순수한 자연과 심성 때문이 아니라 거기서 진행되고 있는, 다큐 영상과는 정반대의 양상이 리얼에 가깝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산을 깎아 고층 빌딩을 짓고, 협곡을 막아 댐을 만들고, 사람들이 몰려와 사막과 진흙 위에 신도시를 만들고, 건설 브로커와 사기꾼, 부패한 관리와 업자들이 창궐하는 오늘날의 '중국식 국가 자본주의'의 주변부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다큐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티벳스러운 것'은 가끔씩 묘사되고 있는 하늘과 별, 바람과 어둠이다. 전통적 방식의 건축을 고집하는 목수(체링의 아버지)거나 티벳 여인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여인 페마와 같은 토착인들의 심성과 의지도 세속 자본주의의 이익과는 무관해 보인다. 작가는 토착적인 심성을 가진 사람들과 상처를 입어 이 곳으로 스며든 외로운 외지인들을 주인공 삼아 이 소설을 밀고 나간다.주인공들을 닮은 문장들은 짧고 함축적이며, 티벳의 맑고 단순한 하늘을 닮았다.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사천성 대지진이다(라고 추정된다). 지진 앞에 수십층 건물 대도가원은 맥없이 무너지고, 급기야는 댐을 폭파하고 신도시와 구도시 전체가 물로 허물어진다. 소설은 지진 속에 묻힌 자들과 그들을 구하려는 사람들, 지진으로 드러난 부패와 이권의 고리,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을 펼쳐 보인다. 건물을 지어서는 안되는 산과 지형에 들어선 초대형 건물들은, 그것이 중국 자본주의의 서부 개발 상징이자 문명의 척도처럼 보이지만, 지진 앞에 속수무책으로 와르르 무너졌다. 무너진 건물 안에 갇힌 사람들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티벳의 가문비 나무로 만든 커다란 탁자 하나. 그 아래 아이 둘과 남자하나가 밀려드는 토사와 건물 잔해 속에서 밤하늘의 별 자리 이야기를 불빛 삼아 겨우 버텨 살아남는다. 남자가 지어낸 별 이야기는 지옥 저 너머의 이야기이자 미완의 이야기, 그 자체로 티벳인들의 삶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문비 나무에 의지하여 문명의 붕괴를 견뎌내기. 붕괴의 와중에서 이야기로 버텨내기, 중장비와 공병대가 아닌 티벳 여인의 삽으로 산 사람들 구조하기. 


이 소설은 인류학자인 작가가 처음으로 써낸 장편이라고 한다. 이 책의 첫 몇 페이지를 읽었을 때, 나는 이 작가는 대여섯권의 소설을 집필한 중견 소설가일 것이라 착각했다. 그의 문장은 처녀 소설을 써낸 자의 것으로는 보기에는 막히고 맺힌 데가 없이 그곳 사람들의 삶의 리듬처럼 흘렀던 것이다. 낯선 곳과 낯선 사람들을 배경으로 그들의 심성과 이력을 보여주는 방식도 고수급이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사내들, 체링, 지우, 왕빈, 장인우는 직업이 다르지만 모두가 비슷한 성격과 심성을 가진 사람들처럼 보인다. 식물성의 심성구조를 가진 자들. 소설의 각 장들은 영화의 시퀀스처럼 한편 한편 끊어질 듯 이어진다. 작가는 이런 인물들과 단편적으로, 내적으로 이어진 시퀀스들로 드라마틱할 수 있었던 이야기를 정지된 영상을 보여주듯이 써내려 간다. 오랜만에 만나는 좋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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