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여행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정희.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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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쓸쓸하고 얼어붙은 오래된 정원에서

  두 유령이 흘러간 과거를 찾고 있네". 


츠바이크는 프랑스 시인 베를렌과 오랫동안 교유를 하고 지냈다. 로맹 롤랑과 더불어 츠바이크의 가장 가까운 프랑스 문인이 바로 이 괴팍한 시인이었을 것이다. 그의 시가 가장 정점에서 등장하는 이 소설은, 츠바이크의 다른 작품들처럼, 안타까움과 쓸쓸함, 삶의 비극성과 아이러니를 드라마틱하게 펼쳐 보인다. 중편 또는 단편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흡인력이 진하다. 대중문학과 고급문학의 중간을 오가는 츠바이크의 작품들은, 대중소설로서의 매력과 본격문학으로서의 통찰을 두루 갖춘, 보기드문 사례일 것 같다. 내가 책을 읽는 재미가 떨어졌을 때마다 그의 소설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일산의 '버티고 서점'에서 샀는데, 소설에 특화되어 있는 이 서점의 '구색'은 높이 살 만하다. 중요한 작가의 덜 알려진 소설, 출간 사실 조차도 잘 알지 못하는 어느 소규모 출판사의 책이라도 여기에 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서점 주인의 안목이 그만큼 뛰어나다. 대형 쇼핑몰의 한 구석에 마련된 이 서점의 서가는, 백화점의 서점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책이 일상의 기호식품처럼 취급되는 비문화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일시적 즉자적 소비의 현장에서 그나마 '숨통'과 '사유'의 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쯤 되면 한때의 철학도였던 서점 주인장에게 고마움 마저 느끼게 된다.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은 운동권 수배자였던 남자가 출감한 뒤 과거의 연인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거기서 '오래된 정원'은 수배와 도피의 와중에 마련된 사랑의 공간, 침범할 수 없는 둘만의 내밀하고 은밀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츠바이크의 그것은 사랑의 내구성이 지속불가능함을, 그것은 이미 '쓸쓸하고 얼어붙은' 것임을 자각하는 장소/시간이다. 실체는 모두 빠져 나가 '유령'이 되어 있고, 시간은 저 너머의 세계에 가 있다. 사랑스럽던 여인은 이제 흰 머리칼이 무성한 중년으로 바뀌어 버렸으며, 전쟁은 두 사람의 가족과 삶을 날카롭게 찢어 놓았다. 


이들의 여행은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오랫동안 갈망해왔던 것이었으나 관계의 재생이 아니라 마지막이 되고 만다. 그게 이 소설속 삶의 아이러니다. 그런데, 이별 여행의 행선지가 하필이면 하이델베르크였을까. 그 곳의 언덕 위에 솟은 낡은 성이야 그럭저럭 여행의 목적지가 될만하다 치더라도, 네카어 강변의 이 소도시는 독일의 철학과 정신, 아카데미의 흔적이 너무 강하지 않은가. 츠바이크의 낭만적 상상력과 하이델베르크는 내게 좀처럼 연결되지 않았는데, 이 도시의 인상이 내게 지나치게 강렬한 탓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건 내가 알지 못하는 게르만 문화권 내부에서 존재하는 하이델베르크에 대한 인식일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집에 함께 실린 '미친 개'에 대한 단편, <당연한 의심>도 아주 재미있다. 집착이 낳은 배제와 복수의 이야기. 그리고 또 하나, 소설 뒷부분의 츠바이크의 삶에 대한 소개는 간결하고 소상한 대로 읽을만한 글이다. 아마도 국내에 소개된 츠바이크의 삶에 대한 글로는 가장 풍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츠바이크의 자살에 이르는 과정을 이 글을 통해 제대로 알 수 있었다. 그의 자살은 갑작스런 선택과 결단이 아니라 오래 준비되고 계획된 사건이었다는 것. 일본의 2차 대전 참전이 아니라, 일본군에 의한 영국군의 패배가 절망과 자살의 중요 계기가 되었다는 것. 그의 우울증과 첫번째 아내와의 이혼, 비서와의 결혼, 영국 바스에 보관된 그의 유품들 등. 츠바이크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유럽 인문주의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은 유럽의 '문명' 반대편에 파시즘이라는 정치적 야만과 아시아라는 인종적 야만을 두고 있었다는 것, 이것이 이 짧은 글에서 새롭게 얻은 인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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