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잠들듯이 편하게 죽고 싶지않다. 나는 죽음이 나에게 찾아온 순간, 나의 존재가 소멸되는 순간에 온건한 정신으로 죽음을 맞이 하고 싶다. 그 특별한 순간에 나는 지나간 내 삶을 회고하고, 내 죽음 이후의 모든 것들을 아쉬워하고, 그래도 뭐, 나름 후회없는 인생이었다고 미소를 지으며 나의 소멸을 맞이 하고싶다.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사람들은 고개를 흔들며 자신은 잠들듯이 편하게, 죽음이 자신에게 찾아 온 줄도 모르게 죽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나에겐 그것이 최악의 죽음이다. 쿨쿨 자다가 삶과 죽음을 나누는 찰나의 순간을 놓쳐버리다니. 나의 죽음을 즐길 수 없다니. 그건 절대로, 절대로 싫다.
이제껏 죽음의 순간에 대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지 못했었는데, 있었다. 아니 있었었다. 그는 이미 죽었지만 이렇게 책으로 나는 그와 만났다. 2011년 12월 15일 휴스턴에서 식도암으로 세상을 떠난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마지막 책 `신 없이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통해.
[1년 반 전 식도암 진단을 받기 전에 나는 회고록의 독자들에게 내 소멸의 순간이 왔을 때 수동적인 의미가 아니라 능동적인 의미에서 죽음을 `하기`위해 완전히 의식이 깨어있기를 바란다고 다소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지금도 나는 호기심과 반항심이라는 작은 불꽃을 계속 유지하려고 애쓰고 있다. 마지막까지 현을 타면서, 사람이 한평생을 사는 동안 경험해야 하는 일들을 모두 경험하고 싶다.]
그래, 맞아. 그렇지. 이 사람 뭘 좀 아는걸. 하고 다음 문장을 보는데 둔기로 가슴을 맞은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중병에 걸렸을 때 생기는 변화 하나는, 믿음이 가던 말들과 익숙한 원칙들을 다시 살펴보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나는 예전만큼 확신을 갖고 할 수 없는 말이 하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내가 죽지 않는 한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줄 뿐˝이라는 말을 예전만큼 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이 문장에 유달리 큰 충격을 받은 건 니체의 말로 알려진 ˝날 죽이지 않는 고통은 날 강하게 만든다˝는 문장이 내가 평소 즐겨 되뇌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이 문장에서 위안을 얻곤 했다. 그런데 히친스는 [사랑이나 증오가 얽힌 시련의 시기를 벗어날 때마다 그 경험을 통해 다른 방식으로는 얻을 수 없었을 힘을 얻었다고 생각하던 것이 기억난다. 또한 해외에서 취재를 하던 중 자동차 사고를 당하거나 폭력적인 일에서 간신이 벗어났던 한두 번의 경험에서 그 일로 인해 내가 더 강해졌다는 얼빠진 기분을 느낀 적도 있다. 하지만 사실 이런 생각은 ˝하느님의 은총이 없었다면 나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고, 이 말은 또한 ˝하느님의 은총이 기꺼이 나를 품어 안고 다른 사람들은 불운 속에 내버려두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하긴 나도 저 문장을 떠올릴 때 마다 결국 언젠간 죽음이 이길 것인데, 강해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곤했다.
나는 아직 젊고, 병을 앓고 있지도 않(은 것 같)다. 그러므로 나의 죽음에 대한 생각은 실제로 겪지 않은 상황에 대한 무지에서 온 오만함일 수도 있다. 먼 미래에(바라건대 아주 먼 미래에) 병상에 누워 고통에 찬 신음을 뱉으며 의사에게 제발 편안하게 죽게 해달라고 애원하게 될 수도 있다. 상황에 따라 사람의 믿음과 원칙은 변하니까.
하지만 되도록 그리되지 않길 바라며 오늘도 나는 운동을 하고, 산책을 하고, 견과류를 한 움큼 집어먹고, 내 앞을 걸으며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숨을 참은 채 서둘러 앞지른다. 건강하게 죽기 위해. 오롯이 죽기 위해. 그리하여 나에게 최후의 지식을 알려줄 죽음과 다정히 인사를 나누기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