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전자책을 사게 될 줄이야.
책이라면 무릇 크고 아름다운 나무토막이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던 내가, 책의 내용만큼이나(어쩔 땐 내용보다) 책의 만듦새를 중요시 하던 내가 결국 이북 리더기를 사고 말았다.
점점 두꺼운 얼굴을 한 양장본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고, 산책 나갈 때 들고 갈 책을 고르기가 힘들어지고, 책장에서 흘러넘친 책이 바닥에 홍수를 일으키기 시작했을 때부터 조금씩 이북에 관심을 가지긴 했지만, 종이책에 비해 그다지 싸게 느껴지지 않는 가격과 물질적 소유욕을 채울 수 없다는 점이 걸려 구입을 미뤄왔다. 거기다 읽는다는 행위를 전자 기계로 한다는 것 자체가 독서의 숭고함을 깎아내리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런 와중에 흔들리는 나를 유혹한 건 알라딘 특별기획 무료 이북들이었다. 각 출판사와 연계하여 만든 편집본들,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비밀 없는 스핑크스``SF 명예의 전당: 그랑프리 TOP 8` 고전의 유혹: 철학. 인문 해제집` 이 앙큼하고 사랑스러운 네 자매 말이다. 한정판매란 말에 이북리더기도 없는 주제에 나올 때 마다 허겁지겁 구매했다. 언젠가 이북리더기를 살 때를 대비해서. (이렇게 생각하는 시점에서 이미 반은 산 거나 다름없다)
최근 점점 싸지고 있는 전자책 가격도 유혹의 불꽃에 바람을 불어넣었다.(종이책은 점점 비싸지고) 거기다 밖에서 읽기에 휴대성이 좋고, 책 제목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도, 타인의 시선을 끌지 않는다는 것도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한 이점이었다. 카페나 야외에서 순수하게 책을 읽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에 어쩐지 유난떠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할 때가 많았다.
결정타를 날린 것은 크레마 샤인 구매시 이벤트로 주는 삼 만 마일리지였다.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내 손은 이미 구매 버튼을......
그리고 어제 드디어 샤인양이 도착했다. 흥분한 나는 콧김을 뿜으며 거친 손길로 박스를 벗기고 하얀 살결의 그녀를 쓰다듬었다. 아래쪽에 있는 전원 버튼을 누르자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사실 처음엔 조금 당황했는데, 가이드 화면의 잔상 현상이 너무 심했기 때문이다. 그림이 바뀔 때 번지듯 뭉게지고, 화면 전환 속도도 느려서 하자품을 보내 준 줄 알고 교환할 생각에 구석에 던져뒀던 박스를 허둥지둥 다시 챙겼을 정도였다. 하지만 혹시 정상적인 현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고 알라딘 계정을 연결시켰다.
그동안 구매만 해두었던 알라딘 네 자매가 주르륵 뜨기에 다운 받고 시험삼아 조금 읽어보았다. 그렇게 하루 사용한 결과 내린 결론은
1. 눈이 편하다. 핸드폰이나 태블릿과의 비교는 어불성설이고 심지어 실제 책보다 더 편한 것 같다.
2. 휴대성이 좋다. 굉장히 가볍고 얇다. 그래서 내구성이 조금 걱정된다. 밟거나 뭉게버리면 돌이킬 수 없을 듯.
3. 19금 책을 읽기 좋다. 책장에 꽂아두기도, 도서관에서 빌려 읽기도 민망하지만 읽고는 싶은 책들을 편하게 읽을 수 있다.
4. 줄긋기(하이라이트), 메모 기능이 있고 동기화가 가능해서 책을 읽으며 생각을 기록하기에 좋을 듯?(이건 아직 사용하지 않은 기능이라 확신할 수는 없다)
5. 화면 전환이 느리고, 버튼 인식이 느려 글이 빨리 써지지 않는다.
6. 북플과 연계되면 좋을 것 같다. 지금도 핸드폰으로 이 글 쓰느라 눈알이 뽑힐지경.
7. 책을 구매하자마자 바로 볼 수 있고, 책 둘 곳도 없는데 또 샀냐는 엄마의 잔소릴 듣지 않아서 좋다.
8. 7번의 결과로 충동구매하기 쉬울 듯 하다. 한 권 다 읽고 한 권 사기같은 규칙을 정해야 할 듯.(하지만 특별 할인 이벤트를 하면 내 손가락은 이미 구매 버튼 위에 있겠지)
9. 흑백화면이라 책장이 칙칙하다. 책 표지가 다들 우울해 보인다.
10. 이미 구매한 책은 책장에서 영구삭제가 안 된다. 안 볼 책은 깨끗하게 정리하고 싶은데 안 되니 조금 짜증(이건 내가 방법을 모르는 걸지도 모르겠다)
일단 생각나는 건 이정도다. 그리하여 내가 첫 구매한 유료 이북은 에른스트 페터의 `슈뢰딩거의 고양이`. 계속 읽고싶었자만 이상하게 손이 안 가서 구매를 미뤄왔는데, 이번 기회에 구입했다. 마침 알라딘 캐시로 이북 구매시 10% 캐시백 이벤트도 하는 중이고하니.
선택의 폭이 넓어졌으니 앞으로는 더욱 신중하게 책을 구매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