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울땐 집에 콕 박혀서 책을 읽는것이 답이다.
7월과 8월엔 일요일에 산책하느라 쓰던 3-4시간을 오롯이 독서에 사용한다. 재작년 한여름에 어리석게도 언제나처럼 오후 12시쯤 산책을 나갔다가 심장마비를 당할뻔 한 후로 내 내면의 주치의는 내게 한여름 산책을 금지시켰다. 나는 주치의의 말을 잘 듣는 착한 환자라 그의 말을 충실히 따른다. 잠은 11시 전에 자고, 운동은 일주일에 3번 하고, 아침은 꼭 챙겨 먹는다.
오늘은 오전 9시쯤 느지막이 일어나 무엇을 할지 내면의 비서와 상의했다. 잠깐! 유발 하라리의 ‘호모데우스‘에 따르면 사실 나에겐 내면의 비서따위는 없고 그 모든 것을 통솔하는 자아도 없다. ‘내가 특정한 소망을 느끼는 것은 내 뇌에서 일어나는 생화학적 과정들이 그런 느낌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들은 결정론적이거나 무작위적일 뿐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다.‘
흠, 아무튼 내 내면의 비서는 집에 아무도 없고 조용하니 오전에는 책을 좀 읽고, 식구들이 집에 돌아와 시끄러워지는 오후에 게임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했고 나는 그것 참 합리적인 판단이라며 납득하곤 전에 읽다 만 ‘사피엔스‘를 마저 읽기 시작했다.
내 내면의 비서, 주치의 그리고 자아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한 저자의 책을 읽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듯도 했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의식에 대해선 아직 그 누구도 그 어떤 것도 명확히 밝혀내지 못했다. 얼마전 인터넷에서 본 과학 기사에 따르면 유럽의 세계적인 뇌과학자와 대수기하학자가 만나 인간의 뇌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두뇌의 신경세포가 모여 형성하는 네트워크는 최대 11차원의 공간을 형성한다고 발표했다고 한다(http://www.sciencetimes.co.kr/?news=%EC%9D%B8%EA%B0%84-%EB%91%90%EB%87%8C-%EC%8B%A0%EA%B2%BD%ED%9A%8C%EB%A1%9C%EB%8A%94-11%EC%B0%A8%EC%9B%90).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박쥐로 사는 기분도 알지 못하는 인간이 11차원인 뇌의 네트워크와 그 네트워크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 있을리가 없다.
나는 나 자신이 존재함을 알고 나와 다른 사람들이 다르다는 것을 안다. 그런 느낌은 그저 생화학적 알고리즘의 결과라고? 그게 무슨 문제인가? 그것이 비생물학적 알고리즘과 전혀 다를바가 없다고? 그래서 뭔가 달라지는가? 내가 없어지기라도 하는가?
이렇게 쓰면 내가 ‘호모데우스‘의 내용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것 처럼 보일 듯도 하지만 사실은 반대다. 그의 글쓰기 솜씨는 탁월하다. 엄청난 분량의 참고 자료들을 읽고 편집하여 자신의 확고한 견해를 구축하고 풀어놓는다. 논리를 전개하는데 막힘이 없고, 흥미로운 예시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책을 읽는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다. ‘어어 이거 말 되는데?‘
나는 이런 책이 좋다. 내 생각의 틀을 무너뜨리고, 더 넓고 흥미롭게 만들어 주는 책. 거기다 술술 읽히기까지 하면 금상첨화다.
오전 내내 집에서 더위에 허덕이며 ‘사피엔스‘를 읽다가 생각을 바꾸어보았다. 지금은 한겨울이고 밖에는 영하의 날씨 속에 찬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지금 우리집은 더운게 아니라 ‘따뜻한 것‘이라고.
자아를 속이는데 성공한 순간 집안의 더위가 온기가 되어 포근하게 느껴졌다. 내 생화학적 알고리즘이 데이터 처리 과정을 바꾸자마자 나의 의식이 다른 이야기를 믿었다. 아니, 내 의식이 다른 이야기를 믿자 내 생화학적 알고리즘이 데이터 처리과정을 바꾼 것일까? 의식이 먼저인가 생화학적 알고리즘이 먼저인가? 아니면 두 가지는 결국 같은 것일까?
이건 아직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