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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이도우 지음 / 시공사 / 201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 이도우 작가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읽을까 말까를 고민했지만 애정하는 작가님의 글이니 읽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는데, 빠져든다. 한 겨울의 강원도 북현리, 해원이 돌아왔다. 호두하우스 펜션으로 가는길에 발견한 작은 독립서점을 보고 관심을 보이지만 멀리서 해원의 모습을 본 은섭은 아쉬운 숨을 삼키고...
늘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 같지만, 오래 떨어져 지내면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는 건 가족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일까. /p49
...H는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을 빌려 갔다. 그녀가 그 책을 좋아하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할 수 없겠지. 가끔 생각한다. 열 권의 책을 한 번씩 읽는 것보다, 때로는 한 권의 책을 열 번 읽는 편이 더 많은 걸 얻게 한다고 내겐 이 책이 그랬다. 두더지가 떠나왔던 자기 집을 눈밭에서 만나는 장면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사실은 패트릭 벤슨의 삽화 버전을 가장 아낀다. 다시 만난 집 처마 밑에 등불 하나가 걸려 있는 그림. 그 삽화가 그립지 않았다면 나도 이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을지 모르지. 하지만 책들이 듣는 데서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셰퍼드의 삽화도 좋다. 황희 정승이 검은 소 이야기를 귓속말로 했던 것처럼, 책에도 그림에도 귀가 있다.
밤이 깊었습니다. 말이 길어졌네요.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
굿나잇책방 블로그 비공개글 /p63
서울에서의 고단한 삶을 잠시 쉬어가고 싶어 돌아온 호두하우스. 이모가 예전 같지 않고 펜션에도 더이상 손님을 들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조금이나마 돕고 싶어 이리저리 움직였던 해원인데 이모랑은 자꾸만 마찰이 생기기만 하는 것 같다. 은섭이 기와집 굿나잇책방의 주인이란걸 알고 드나들다가 겨울동안 스케이트장 일을 보느라 서점 아르바이트를 구한다는걸 알고 본인이 해보겠다고 하는데...
진실과 거짓을 섞어서 말하는 사람들이 가장 어렵다. 그렇게 섞여 있는 진짜와 거짓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으니까. 언젠가 장우 녀석이 자기는 진실과 거짓을 칠 대 삼 정도로 섞어서 말한다고 했다. 그러면 곤란한 일이 생겨도 그런대로 해결할 수 있다고. /p119
"나는 그 말이 싫어, 오해라는 말."
두 남자의 동작이 멈췄다.
"뭐가 오해야? 그냥, 잘못했으면 잘못했다, 실수였다, 미안하다 그러면 되는 거지. 오해하셨네요, 뭔가 오해가 있으셨나봅니다, 오해를 풀어드리려고요... 왜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까?
장우는 새삼 술이 깨는 눈빛이었다.
"누가 뭘 오해했다는 건데, 그건 두 번 상처 주는 거야. 오해할 만큼 이해력이 모자랐거나 독해력이 떨어졌거나, 의사소통에 센스가 없어서 혼자 잘못 알고 있었다는 거잖아. 그거 아니잖아, 오해는 없어, 누군가의 잘못이 있었던 거지. 그걸 상대방한테 네가 잘못 아는 거야, 라고 새롭게 누명 씌우지 말라고." /p132
혼자일 때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고, 외로움에서 배우는 일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기대하는 바가 적을수록 생활은 평온히 흘러가니까. 진정으로 원하는 게 생기는 건 괴롭다. /p191
젊어서 소설가였고 여행가였던 이모는 호두하우스 펜션에 정착하고 더 이상 글을 쓰지도 여행을 하지도 않는다. 다른 이의 일엔 관심이 없어 보이는 해원은 무심한듯하지만 여린 사람이고 은섭은 고요한 듯 고치같이 자신만의 내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작은 시골마을 굿나잇 책방을 중심으로 모이는 사람들은 많지 않지만 그 속에서도 이야기는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자신의 어린 시절 비밀을 절친에게만 이야기했는데 언제부터인지 온 학교에 자신의 이야기가 흘러 다니고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말도 없이 절친이었던 보영을 피하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지도 않았다. 시간이 흘러 마주한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는 해원에게도 충격이었지만 그녀들의 관계를 통해서 내 모습을 보기도 했다. 혼자 생각하고 결론을 내리면 다른 건 돌아보지 않는, 내가 상처받았으니 다른 이야기는 더 듣지 않겠다는 차단을... 어쩌면 이런 내 행동으로 상처받았고, 이야기도 해보지 못하고 떠난 이들이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그의 사랑은.... 눈송이 같을 거라고 해원은 생각했다. 하나 둘 흩날려 떨어질 땐 아무런 무게도 부담도 느껴지지 않다가, 어느 순간 마을을 덮고 지붕을 무너뜨리듯 빠져나오기 힘든 부피로 다가올 것만 같다고. 그만두려면 지금 그래야 한다 싶었지만 그의 외로워 보이는 눈빛에서 피할 수가 없고, 그건 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은섭은 마침내 결심이 선 듯 싱긋 웃었다.
"그래. 가보자. 너를 사랑하면 어떻게 되는지, 나중에 알게 되겠지."
혜원의 심장이 두근두근 빠르게 뛰었다. 그는 마치 어떻게 돼도 좋다는 듯이 말했지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웃고 있어도, 그 눈빛에서 그가 누구보다 상처받기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녀는 깨달았다. 애초에 상처받을 만한 일들을 다 차단한 채 살아왔다는 걸. 그런 은섭을 그녀가 지금 흔들어놓고 있다는 것을. /p198~199
"연애가 나쁜 게 아니고요, 뭐랄까 저 사람들은 고독이 필요해서 온 거거든요? 딱 보면 그렇잖아요. 저는 알 것 같던데."
해원이 되물었다.
"그래 보였어? 고독이 필요한 사람들처럼?"
"네, 사랑 - 그거 별거 아니에요." /p238
짧은 시간이지만 해원이 은섭을 인지하고 그에게 빠져들게 되었던 건, 책을 읽다 보면 그냥 알게 된다. (은섭이 해원을 해바라기한 시간이 꽤나 길었다.) 그의 사랑은.... 눈송이 같을 거라고 해원은 생각했다. 하나 둘 흩날려 떨어질 땐 아무런 무게도 부담도 느껴지지 않다가, 어느 순간 마을을 덮고 지붕을 무너뜨리듯 빠져나오기 힘든 부피로 다가올 것만 같다고. 굿나잇책방을 운영하며 블로그에 비공개 글로 은섭이 남기는 글들을 읽는 건, 비밀 연서를 읽는듯한 두근거림으로 다음 행보를 기대하게 되고 책방 운영과 책에 대한 이야기도 너무나 좋았다. 작은 책방 운영에 대한 어려움도 있겠지만, 한번쯤 해보고 싶다 라는 생각을 하게 했으니...
잘 자요. 내 침대에서 잠든 사람.
인생은 그리 길지 않고 미리 애쓰지 않아도 어차피 우리는 떠나. 그러니 그때까지는 부디 행복하기를. /p278
"내가 가장 두려운 건, 하는 일이 잘 되지 않거나 실패하는 게 아니야. 농담할 수 없는 상황이 오는 게 제일 두려워. 왜 말을 하지 않느냐고? 농담이 안 나와서 그래. 너를 웃겨줄 말이 생각이 안나서." 그러고는 낮은 한숨과 함께 고백하듯 말했다.
"널 사랑해. 앞으로도 늘 그럴 거야." /p382
겨울, 깊은 밤 새벽 소담히 내리는 눈처럼, 그 눈이 겨우내 쌓이다가 한파, 폭설이 되어 꽁꽁 얼어붙었다가 봄바람에 조금씩 녹아내리고 어느새 따스해진 기온에 꽃을 피워내는 시간은 겨울과 봄 사이 두 계절 사이의 이야기는 한여름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듯한 기분이었다. 애틋함이나 깊은 애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오히려 일상 속의 덤덤함 속에 조금씩 삐져나오는 뾰족함과 애정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더 짚어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는 <사서함110호의 우편물>과 나란히 놓아두어야겠다. 아마도 이 글을 읽은 분들은 한 번쯤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 동네에도 '굿나잇책방' 같은 작은 서점이 있었으면, 은섭같은 주인장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깊어가는 여름을 지나가던 시간 책장을 덮고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았지만 난 은섭과 해원이 지나온 겨울과 봄 사이의 시간에 있는듯한 어디 즈음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한때는 살아가는 일이 자리를 찾는 과정이라고 여긴 적이 있었다. 평화롭게 안착할 세상의 어느 한 지점. 내가 단추라면 딸깍 하고 끼워질 제자리를 찾고 싶었다. 내가 존재해도 괜찮은, 누구도 방해하지 않고 방해도 받지 않는, 어쩌면 거부당하지 않을 곳. 그걸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어디든 내가 머무는 곳이 내 자리라는 것. 내가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면 스스로가 하나의 공간과 위치가 된다는 것. 내가 존재하는 곳이 바로 제자리라고 여기게 되었다. 가끔은, 그 마음이 흔들리곤 하지만. /p388
"날씨가 좋아지면 만나자고? 만나지 말자는 소리네."
"왜 또 그런 소리가 돼"
해원이 짜푸렸지만 명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날씨가 언제 좋아지는데. 추위 끝나고 봄이 오면? 꽃 피고 새울면?"
"그런 거지, 뭐. 겨울 지나고... 따뜻한 바람 불면서 봄이 오면."
"그럼 미세먼지를 끌어안고 황사가 오겠지. 봄 내내 뿌연 하늘이다가 겨우 먼지 끝나면 폭염에 장마가 오겠지. 그냥, 만나기 싫다고 솔직히 말하렴.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 날씨 좋을때 보자.....난 그런 빈말 싫더라." /p2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