앰 아이 블루?
마리온 데인 바우어 외 12인 지음, 조응주 옮김 / 낭기열라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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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바다를 연상케 하는 표지에 마음을 빼앗겼다. 내가 좋아하는 색은 파란색. 내게 푸른 느낌은 차갑기보다 시원하다는 쪽이고, 넓고 깊은 느낌이다. 난 아마 '푸르다'라는 말에서 무의식적으로 하늘과 바다를 연상하는가보다. 하지만 영어로 쓰여진 Blue를 보면 또 다르다. 시원하고 넓은 느낌보다 어둡고 깊이 가라앉은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 파란색이 눈에 바로 보이는 바다 수면이라면, Blue는 그 수면 아래 깊고 깊은 바닥같은...뭐 그런 느낌이다. 그래서 제목 <앰 아이 블루?>에서 느껴지는 첫 이미지는 나에게는 확실히 깊은 우울함이었다. 음... 생각해보니 그건 어쩌면 내가 Blue의 사전적 정의에 충실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첫 느낌을 표지와 다르게 우울할거라고 생각한데에는 <앰 아이 블루?>가 동성애를 다룬 단편소설집이라는 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동성애'란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긴 하지만 아직까지도 터부시 되고 금기시 되는 것 중에 하나니까. 내가 특별히 '동성애'를 혐오하는게 아닌데도 사회적으로 넓게 형성된 편견은 이런 순간, 어김없이 작용한다. 즉, 굳이 따지자면 난 그들의 사랑을 조용히 지지해주는 쪽임에도 그 사랑이 마냥 암울할거라고 판단해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생각들이 그들을 더 우울하고 힘들게 만드는것일지도 모르는데.

책은 13명의 작가가 한창 정체성으로 고민하는 청소년들의 '동성애'를 주제로 쓴 단편들을 묶은 것이다. 작가가 모두 다른만큼 이야기들도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지루할 틈이 없다. 각각의 짧은 단편들은 하나의 스토리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랜 여운을 남기고, 가만히 앉아 나를 돌아보고 주위를 둘러보게 하는 시간을 갖게 한다. 내용이 감동인지 아닌지를 떠나,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글은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따뜻해지거나 내 안의 꽉 막히고 편협한 무언가가 깨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 말이 조금 과장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적어도 '동성애'에 대한 그동안의 나의 위선을 일깨워 주기에 충분했다. 내가 그동안 그들을 이해하고 존중한다고 말했던 건 어쩌면 의식의 밑바닥에 '동성애는 어차피 먼 타인의 얘기. 나랑은 상관없어!'라는 것을 깔아두고 한 것인지도 몰랐다. 나와 내 주변의 일과는 상관없으니 난 한껏 여유로울 수 있어라는 오만한 생각.

사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들을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방관하는 자세로 이해하는 척 하는 건 엄연히 틀린 것이다. 나는 후자쪽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조금 부끄러워졌다. '~하는 척'을 싫어하는 내가 사실은 멋진 척, 이해심 많은 척, 잘난 척을 해왔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나를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단순히 '동성애'에 대한 나의 시각뿐 아니라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돌아보게 해 주었으니 말이다. 책이 '동성애'나 '동성애자'에 관한 이해를 돕고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에 더해 읽는 사람의 사고 변화에도 영향을 주고 있고, 문학성 또한 탁월하니 내가 별 5개를 주는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조금 아쉬운 것은 94년에 발간된 책이 10년이 훌쩍 지나서야 국내에 번역되어 나왔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 책은 출간 당시 <미국도서관협회 최우수 청소년 도서>로 선정되기도 한 꽤 유명한 책인데 말이다. 그렇게 따지니 우리나라에서 동성애를 주제로 하는 외국책(특히 청소년 문학)이 나오려면 10년이나 걸릴 만큼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것인가 싶은 생각도 들고. 뭐 그동안 국내 출판사에서 이 책의 진가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면 할 말은 없지만. 어쨌거나 늦게나마 번역본을 볼 수 있다는 데 감사하며,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또한 판매액의 1%는 ‘청소년 동성애자 인권학교(http://queerschool.org)‘에 기부된다고 하니 왠지 조금이나마 그들을 후원한다는 느낌도 들고. 어쨌든 이 책을 읽는 시간은 여러모로 뜻깊은 좋은 시간이어서 읽은지 며칠이 지나도 마음 한 구석이 따뜻해서 참 좋다.


+) "편협한 사람치고 어렸을 때 책 읽은 사람 없더라"
서문에 나오는 이 말이 가슴에 깊이 박혔다.
뭐 요즘은 이른바 인텔리라고 불리는 사람이 더 편협한 경우도 있더라만.
그건 너무 많이 읽어서 자기가 젤 우월하고 잘났다고 생각하게 된 걸까?
아니면 그런 사람들은 방법론이라던지 계발서만 읽어서 그런건가?
뭐 모를일이지.
어쨌거나 소설이 주는 가장 좋은 점은 폭 넓은 간접경험에 있는 것이다.
그 경험으로 인해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과 변화가 생겨서 좋다.
'다름'과 '틀림'을 제대로 아는 내가 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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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회계사 사건수첩 - 주가 조작과 비자금 조성 편
야마다 신야 지음, 김진태 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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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코너를 기웃거리다 이 흥미로운 제목의 책을 발견한 건 순전히 우연이다. <女회계사 사건수첩 - 미녀 회계사 모에미의 감사보고서 : 주가조작과 비자금 조성편>이라는 장황한 제목과 부제를 달고 나타난 이 책은 이미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가끔 버스를 타고가다 보면 '세무사', '공인회계사'같은 간판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걸 볼 때면 '세무사와 회계사의 차이점이 뭐지?'하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아쉽게도 잠깐 생각하는 걸로 그칠 뿐 제대로 알아본 적은 없다. 막연하게 느낌으로만 알지 누군가 설명해보라면 '엄...그냥 세무사는 세금관련일 하는 사람이고, 회계사는 기업의 장부를 감사하는 사람이 아닐까?'라며 우물쭈물할게 뻔한 그런 지식이었다. 사실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이 책의 소개를 보니 회계사라는 직업에 대해 알기 쉽게 풀어낸 직업문학이라고 한다. 스르륵 넘겨 뒷부분에 실린 부록을 보니 '회계사'와 '세무사' '세무공무원'에 대한 차이점과 회계에 대한 몇 가지 사항도 Q/A코너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엉? 세무사랑 세무공무원이랑은 또 어떻게 다른거야? 흠. 읽어봐야겠네.

이야기는 서른의 노총각, 가키모토 가즈마가 스물여덟에 갓 입사하여 2년간 있었던 에피소드들을 기록한 것이다. 패기는 넘치나 융통성이 조금 부족한 가키모토가 노련한 모에미와 파트너가 되어 회계감사를 다니며 겪게 되는 일들은 꽤 흥미진진하고 즐겁다. '후지와라 모에미'는 최연소 공인회계사에 합격한 인물로 현재는 24세, 5년차 회계사이다. 서른이 훨씬 넘어서 겨우 합격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녀는 스무살에 보란듯이 합격했으니 나이는 어리지만 꽤 실력가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모에미가 공부벌레타입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패션과 유행에 민감하고, 유흥과 남자에 관심이 많다. 게다가 미인형이라 추종자도 많으며 자신의 외모를 이용할 줄도 아는 여우다. 한마디로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인재랄까.

기업의 회계감사라면 왠지 지루하고 고리타분할 듯한데, 소설은 추리적 요소를 살짝 집어넣어 재미있게 그려내고 있다. 기업의 드러나지 않은 문제점을 지적해내고 바로잡아가는 모에미를 보고 있으면 꼭 미녀탐정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모에미는 겉으로는 빈둥빈둥 노는 것 같아 보여도 결정적인 순간, 문제점이나 비리를 포착하는 능력은 과연 프로임을 보여주는 주인공이다. 짓궂은 말로 후배사원을 골탕먹이기 일쑤이고, 경마장에 갔다가 지각하기를 밥먹듯이 해도 그녀가 프로일 수 있는 이유는 평소 뛰어난 관찰력과 추리력으로 정보를 빨리 습득하기 때문이다. 경마장에서 귓등으로 흘려들은 소문조차 사건해결에 결정적인 역할로 쓸 줄 아는 그녀다. 가끔 너무 앞서가는 엉뚱한 추리가 황당할 때도 있지만 그 엉뚱함이 사건(?)해결의 열쇠가 되기도 하니 도저히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다. 전형적인 주인공 타입이랄까.

왜 학교 다닐때 보면 꼭 이런 사람 하나씩 있지 않나. 학교에서 맨날 잠만 자고 땡땡이 치고 노는데도 시험보면 성적이 톱을 달리는 괴물 같은 아이. 여러 분야에 대해 호기심이 많아 이것저것 알기를 좋아해서 이야기를 해보면 박식하기까지한 아이. 모에미가 딱 그렇다. 매뉴얼대로만 해서는 절대로 찾을 수 없는 문제를 그녀는 나름의 경험과 추리를 통해 멋지게 풀어가니 샌님같은 가키모토는 그저 부러울 수 밖에.

이 책은 지루하지 않게 회계사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는 것과 회계용어나 주식관련 용어를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어서 좋다. 나처럼 그 쪽으로는 전혀 모르는 문외한에게는 참 고마운 책이다. 하지만 전개가 빠른 탓에 회계감사의 과정이 비교적 쉽게 묘사되어 자칫 가벼워 보일 수 있다는 게 단점이다. 그 부분은 작가가 '무겁지 않고 대중성과 오락성을 갖춘 회계 관련 소설을 쓰는 것'이 목표라고 했으니 오히려 목적에는 충실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마지막 에피소드에 뜬금없이 들어간 판타스틱 동화같은 이야기는 조금 지나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지은이의 소설가로서의 욕심일까. 어쨌든 독자로서는 조금 안타깝다. 회계의 구조를 알면 회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꼭 경영자가 아니라도 주식을 하는 사람은 회사를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으니 회계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안그래도 기회가 되면 경영이나 주식관련 공부를 해보고 싶었는데 이 책이 촉발제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니 이미 진행중일지도.



+ 생각해보면 회계사와 세무사, 세무공무원이 차이는 헷갈릴 것도 없는 거였다. 입장의 차이만 제대로 알면 되는 거였는데...; 어쨌든 이제는 헷갈릴 일 없겠지! :)

+ 간단히 정리하여 부록으로 실은 회계용어를 알아두면 꽤 유용하겠다. 대차대조표라던지, 분개, 분식 같은 용어를 일반시민이 어찌 정확하게 알까.(설마 나만 몰랐던 거?) 이 기회에 알아두면 좋을 듯 하다.

+ 모에미같이 선천적으로 가진 능력도 좋은데 알게 모르게 노력하는 애들 보면 참 자극받는다. 이건 기분 좋은 자극이다. 음. 좋은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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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Lemon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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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군가와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듣는 편이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혹은 "OO랑 닮았다는 말 듣지 않아요?" 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일상다반사가 되어버렸다. 그 OO란 일반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연예인이나 언론인이 대부분인데, 그런 말을 들을때면 기분이 묘해지곤 한다.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예쁜 연예인을 닮았다라는 말이 한편으론 칭찬의 의도일 수 있으나, 가끔은 '나'보다 '누군가와 닮은 사람'이라는 것에 중점을 둬버리면 괜히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하니까 말이다.

누군가를 닮았다는 말도 간혹 그렇게 기분이 묘해지는데, 만약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난다면 그 느낌은 어떨까? 얼굴뿐 아니라 체격도 키도 목소리도 같다면? 예전에 일이 몹시 바쁠때면 '내가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다~'라며 투덜투덜 하곤했었는데, 진지하게 그런 상황을 상상해본다면 어쩐지 조금 무서워진다. 만약 정말로 나와 똑같은 사람이 하나 더 있다면...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진짜라는 거지? 나라는 존재가 유일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나서의 혼란은... 아마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일본 영화 <비밀>의 원작가로, 내년 1월에 일본에서 드라마로 방영예정인 <백야행白夜行>의 작가라는 것 정도. 일본 추리소설계에서는 꽤 유명한 인물이라는 것을 빼면, 책을 읽어본 적이 없으니 안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 책에 손이 간 이유는 아마 <분신分身>이라는 제목때문일 것이다. 내가 어릴때, '도플갱어'를 겪은 사람은 그 이후로 원인도 모르게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이야기는 당시의 나에게 호기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와 똑같은 분신을 만나고 싶다는 순수한 호기심. 그리고 이내 따라붙는 그런식으로 죽고 싶진 않다는 두려움. 딱 아이다운 그때의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호기심과 두려움이 가득했던 어린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읽은 <레몬>은 의외로 생각할 것이 많은 책이었다. 두 주인공 마리코와 후타바가 각 장마다 서로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구성이었는데, 추리소설답게 빠르게 이어지는 스토리는 쉽사리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 책이 처음 쓰여진 시기(1993)를 생각하면 뒷내용은 이미 충분히 상상이 감에도 이런 류의 내용은 언제나 흥미를 유발시킨다. 게다가 현재 전국민의 최대 관심사인 '황우석 사건'과도 연관이 있으니 더 그럴수 밖에. (나는 이제 책속에서 '줄기세포'와 '난자'라는 단어만 봐도 '황우석 교수'가 떠오르니 이건 완전 자동. 다른 사람도 그러려나;;) 

소설이 출간된지 이미 12년이나 지난 탓인지, 아니면 널리 보급된 인터넷과 미디어의 영향으로 '배아복제'니 '난자추출' 및 '체외수정'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을 지니고 있는 탓인지 소설속의 배경이 되는 것들이 새롭지는 않다. 특히 작금의 사태를 비추어 볼때 오히려 독자쪽이 아는게 더 많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그래도 세월이 지나 그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이 더 늘어난 상태에서 봐서 오히려 조금 더 다각도로 생각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특히 모성(母性)에 대한 부분은 새로운 느낌으로 눈물샘을 자극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진취적으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려던 여자도 생물적 본능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을까. 끊임없이 생각하지만 '엄마'란 존재는 정녕 위대하다. 여자로서는 한없이 약한 존재인 그녀들이지만 어머니라는 지위앞에는 언제나 강하고 대범하고 너그럽다. 존경합니다 어머니!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 참 마음에 들어버렸다. '인류를 위해, 더 나아가 미래를 위해서'라는 허울좋은 명목으로 과학을 이용하지 말라고 책은 말하고 있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도 된다는 식의 말은 군사독재 정권때나 통했던 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소수'의 입장이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당신은 절대다수의 울타리안에 속해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속단하지 말라. 언제 울타리 밖으로 내쳐질지 모르는 일이다. 책 속 문구중에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말이 있다. '집단은 광기를 만든다'는 말. 광기를 열정이라고 착각하지 말라. 그 착각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위대한 업적이 아니라 또 다른 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출판사의 의도인지 어떤지 모르지만 시대상황과 묘하게 맞물려 읽는 재미가 남달랐던 작품이다. 어렵지 않은 책이고 위에서 말했듯, 나(인간)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어 한번쯤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덧) <레몬>을 읽기전에 간단한 표지선정 투표를 한적이 있다. 4가지 표지중에서 투표하는 것이라 재미삼아 했었는데, 내가 고른것이 메인이 되어 내심 기분이 좋았다. <레몬>의 원제가 <분신分身>임을 감안하면 표지에서나마 원제의 느낌을 충실히 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은 사람이야 <레몬>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바로 알 수 있겠지만, 사실 추리소설의 제목이 <레몬>이라니 뭔가 겉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니 분신이 '분신자살焚身自殺'의 의미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안타까운 이유로 원제를 그대로 옮겨오지 못했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못내 아쉬울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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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전략 - Reading & Writing
정희모.이재성 지음 / 들녘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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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상은 수많은 글들로 홍수를 이루고 있다. 디지털의 발달로 이미지의 활용이 확산되면서, 상대적으로 텍스트가 줄어들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천만의 말씀. 각종 온라인 게시판과 1인 미디어의 시초라 불리는 블로그가 성행하면서, 오프라인에서는 미처 발휘하지 못했던 역량을 십분 발휘하는 사람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오는게 현실이다. 개중에는 전문가 못지 않은 글을 뽐내는 아마추어 글쟁이들도 상당수다. 적잖이 인터넷을 즐기는 사람으로서, 나도 블로그를 운영하고 간간이 글을 올리고는 하는데 이따금 글이 써지지 않아 말 그대로 OTL(좌절)상태가 되고는 한다. 그럴때는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서두는 커녕 글의 소재도 떠오르지 않아 결국은 포기를 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비단 나같은 블로그 운영자 뿐이랴. 중,고등학생이라면 글짓기 혹은 논술과제를 해야할 때, 대학생이라면 리포트를 쓸 때, 취업준비생이라면 자기소개서를 쓸 때마다 겪는 문제일 것이다. 블로그 운영자야 대부분 자기만족을 위해 글을 쓰겠지만 후자의 경우는 그 자체가 입시 및 학점, 취업과 직결되니 글쓰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스트레스의 강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글쓰기의 전략>은 그런 사람들의 고민을 적게나마 덜어줄 수 있는 책이다. 기존의 개념적이고 이론적인 글쓰기의 조언이 아닌, 구체적인 방법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기에 이론서이기 보다는 실용서에 가깝다. 책은 총 13장에 걸쳐 이루어져 있는데, 나의 경우 책을 다 읽고나서 자신감과 함께 막연하게 느꼈던 글쓰기의 체계를 잡을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 사실, 글쓰기에 관해 따로 공부를 하거나 일부러 강의를 듣지 않는 이상 그것은 언제나 '멀고도 가까운 당신'인 것이다. 쓰고 싶은 말들은 넘쳐나는데, 그것을 효과적으로 정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많이, 자주 쓰다보면 자신만의 체계가 잡히기는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이 책은 그런 취약점을 보완해 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책은 각 장이 끝날때마다 <알고보면 쉬운 우리글>이라는 코너를 선보이고 있는데, 자칫 틀리기 쉬운 단어나 헷갈리는 맞춤법 및 띄어쓰기에 관해 이해가 쉽도록 설명하고 있다. 이 코너는 얼핏 대단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대수롭지 않게 지나갈 수 있는 것을 되짚어 줌으로써 좀 더 완성도 높은 글쓰기에 기여하고 있다. 아무리 잘 쓴 글도 엉뚱한 곳에서 틀린 단어를 사용하거나 맞춤법이 틀려버리면 글에 대한 전체적인 신뢰도가 떨어지고 만다. 그것은 글을 쓴 사람에게도, 읽는 사람에게도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코너는 작지만 강한 코너이며, 즐겁게 읽을 수 있다.

단, 앞에서도 말했지만 책이 실용성에 중심을 두고 있기에 자칫 '고등학교 작문책'처럼 보여서 답답할 수도 있겠다. 잘 쓰여진 글을 예문에 내세우고, 그에 대해 분석하며 이론과 실제적 방법을 내보인 후, 예제를 풀어보라는 것은 아무리 좋게 말해도 교과서의 전형이긴 하다. 그래서 오래 읽다간 지루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야말로 이 책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많이 보고, 많이 이해하고, 많이 쓰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책은 흔하지 않다. 교과서마냥 답답하면 어떤가. 오히려 그렇기때문에 지침서로서 믿음이 가는 것이다.

'전략'의 사전적 의미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여러 전투를 계획·조직·수행하는 방책으로, 그리스어 strategia(將帥術)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 그 의미는 초기에는 '전쟁에서 적을 속이는 술책'이라는 뜻으로 쓰이다가 현재에는 그 의미가 발전하여 국가 및 경영, 심지어는 입시에도 쓰인다. 그런 '전략'이 이제는 '글쓰기'에도 쓰이는 날이 온 것이다. 이것은 글쓰기가 그만큼 중요해졌다는 것이며, 좀 더 빠른 시간안에 최대의 효과를 창출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알고만 있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예컨대, 영어를 잘 하기 위해 영어학습법에 관한 책들을 수십권 독파한다고 해서 영어를 잘 하게 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요는 그 책들의 도움을 얻었으면 실행에 옮겨야 한다는 것. 아직도 글쓰기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당신, 이 책에서 도움을 얻었다면 차근차근 실행해 보라. 눈에 띄든, 안 띄든 분명히 효과는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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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사
수키 김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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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고를때는 나름대로 고심하며 고르기는 하지만, 가끔은 제목 하나만으로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하는 책이 있다. <통역사>가 그런 경우였는데, 이것은 마치 직업병 같은 것이다. 언어를 전공한 나는, (게다가 한때는 직업으로도 생각해봤던) 통역이니, 번역이니 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 눈에 띄면, 그것이 그저 잠깐 인용된 단어일지라도 이내 호기심이 발동하고 마는 것이다. 패션을 전공하는 동생이 TV를 볼때면 연예인의 얼굴이 아니라 입고있는 의상 브랜드와 스타일에 먼저 눈이 가는 것 처럼.

그렇게 불순한 생각(?)으로 접하게 된 이 책은 첫 문장부터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오전 9시의 담배는 절망감의 표현이다.」
이 짧은 단 한줄의 문장에 수 만가지 생각이 뭉글뭉글 피어오른다. 도대체 어떤 상황에, 어떤 마음이면 저런 문장을 토해낼 수 있을까.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9시란 시각에 담배를 피우는 여자, 게다가 그 담배마저 절망감의 표현라니...나는 이미 첫 문장부터 푹 빠지기 시작한다.

흔히 말하는 1.5세대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를 따라 이민을 가게되어 그곳에 정착한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자의로 한국을 떠난 1세대와 처음부터 그곳에서 태어난 2세대와는 다르다. 분명 한국 태생이지만 사춘기를 낯선땅에서 보냈고, 그 곳의 말을 유창하게 사용하지만 정체성은 그곳에 속해있지 않은 (혹은, 속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다. 주인공인 '수지 박'은 그런 1.5세대이다. 한국계 미국인인 그녀는 29세의 통역사로, 한국어 통역일을 맡고 있다.

그녀의 이력은 간단하지만, 화려하다.
어릴적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왔으나, 첫사랑이 불륜(게다가 미국인)이라는 죄로 부모와 절연했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한국의 가부장이었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 앞에서는 입도 뻥긋 못하고 속앓이를 하시는 분이었다. 미국으로 이민을 왔음에도 아버지는 한국인의 뿌리를 중요시했고,그만큼 미국을 증오했다. 언니(그레이스)는 사사건건 그런 아버지와 부딪혔고 수지는 그 모습을 보고 자랐다. 그러나 정작 아버지의 뒷통수를 때린건 수지였고, 그 결과로 수지는 도망치듯 한인사회를 떠났다.  그러나 그 부모님도 5년전 강도의 총에 맞아 살해당하셨고, 하나뿐인 혈육인 언니와는 연락두절 상태다. 부모님의 사망으로 수지는 스스로 첫사랑과 끝을 맺었다. 그러나 인정받지 못한 첫사랑은 깊은 후유증을 남긴다. 그녀는 마치 사랑은 불륜만 할 것 처럼 현재에도 또 다른 남자와 그런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간간히 의뢰가 들어오는 통역업무.

조금은 나른하던 그녀의 일상은 부모님의 기일이면 어김없이 배달되어오는, 엄마가 좋아하던 아이리스 꽃을 받으면서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순간 궁금해진 것이다. '누가 해마다 이 꽃을 내게로 보내는가?'
그리고 얼마 안가서 나는 이 소설의 장르가 평범한 일반문학임이 아님을 알아챈다. 이 소설...'추리'다. 아니, 정확히 한 장르로 구분짓기 어렵다. 아주 미묘하게 의식 저 아래에 깔린 그 무엇을 자극하는 상당히 매력적인 소설이다. 통역사는 양쪽 언어의 중간자 역할이 아닌, 마치 탐정처럼 사건의 실마리를 풀고 있다. 차분하게 서두름 없이,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이 작품이 데뷔소설이라는 '수키 김'은 범상치 않은 글 솜씨를 선보인다. 흔히 추리소설이라면 기승전결이 뚜렷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클라이막스 부분에 이르면 독자들을 정신없이 사건의 중심으로 몰고간다. 그러나 수키 김은 속도의 완급과 강약조절이 능숙하다. 정신없이 몰아치기 보다는 중요할 때 한 걸음 물러서서 관망한다. 강한 실마리를 제공하고도 뜸을 들인다. 제 3자의 시점에서 서술하고 있기에 독자는 더욱 더 애가 탄다. 덕분에 나같이 성질 급한 사람은 뒤가 궁금한 탓에 읽는 속도에 탄력이 붙는다. 말 그대로 술술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을 읽고 난 뒤의 기분이 썩 개운하지는 않다. 사건은 해결되었지만(아니 사건의 전말을 알았다고 해두자) 책에서 끊임없이 보여주던 이민 1세대들의 눈물겨운 투쟁, 1.5세대들의 애환이 영 마음에 걸리는 탓이다. 간혹 매체에서 다루던 극소수 '이민자移民者의 성공스토리'와 확연히 대조되는 그들의 삶에 마음이 아프다. 빨간색 바탕에 옛 교복을 입고 서있는 여학생의 표지가 무엇을 말하려 함인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아,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꾹 참으면서 나는 책장을 덮는다.


덧) 수키 김은 이 책으로 미국 내에서 출판되는 다양한 인종과 색채의 문학 작품에 수여되는 '경계문학상'과 '구스타프 마이어 우수도서상'을 수상했다. 2004년에는 헤밍웨이 문학상의 후보작에 올랐으며, 미국 최대의 서점 반즈 앤 노블에서는 '올해 주목할 작가 10인' 중의 하나로 수키 김을 선정했다고 한다.

나의 독서수첩에도 기대되는 작가 목록에 '수키 김'의 이름을 써 넣는다.
데뷔작에서 이미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 그녀의 다음 행보를 기대해 본다.


++ 기억에 남는 문구
 
수지는 지방 검사보의 이야기를 들으며 중요한 단어를 수첩에 적는다. 통역을 할 때는 아무리 문장이 길더라도 모든 단어를 정확히 옮겨야 하다. 통역사는 수학자하고 비슷하다. 그녀는 방정식을 푸는 것처럼 언어를 대한다. 단어 하나하나마다 동의어와 맞추어야 한다.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정답을 얻을 수 있다.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수지는 예전부터 이런 방면에 소질이 있었다. 두 가지 언어를 쓰면서 자란 환경 때문은 아니었다. 이민자 자식들이라고 해서 다들 통역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수지는 동시에 두 가지를 할 수 있는 남다른 능력이 있다. 그녀는 단어를 들으면 사전적인 의미와 함축적인 의미를 분리한다. 직역은 오역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언어는 논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통역사는 단어를 그대로 옮기면서도 이쪽 언어와 저쪽 언어 사이의 간격을 교묘히 메울 줄 알아야 한다.

... 2에 2을 더하면 4가 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의미가 될 수 있음을 아는 사람이 진정한 해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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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11-19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그래서 더 좋았고 뜻밖의 보물을 얻은 기분이었답니다. 책 내용하고는 달리요...

다소 2005-11-19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맞아요 :) 오랜만에 소설책에 푹-빠져서 읽은 느낌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