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사
수키 김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책을 고를때는 나름대로 고심하며 고르기는 하지만, 가끔은 제목 하나만으로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하는 책이 있다. <통역사>가 그런 경우였는데, 이것은 마치 직업병 같은 것이다. 언어를 전공한 나는, (게다가 한때는 직업으로도 생각해봤던) 통역이니, 번역이니 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 눈에 띄면, 그것이 그저 잠깐 인용된 단어일지라도 이내 호기심이 발동하고 마는 것이다. 패션을 전공하는 동생이 TV를 볼때면 연예인의 얼굴이 아니라 입고있는 의상 브랜드와 스타일에 먼저 눈이 가는 것 처럼.

그렇게 불순한 생각(?)으로 접하게 된 이 책은 첫 문장부터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오전 9시의 담배는 절망감의 표현이다.」
이 짧은 단 한줄의 문장에 수 만가지 생각이 뭉글뭉글 피어오른다. 도대체 어떤 상황에, 어떤 마음이면 저런 문장을 토해낼 수 있을까.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9시란 시각에 담배를 피우는 여자, 게다가 그 담배마저 절망감의 표현라니...나는 이미 첫 문장부터 푹 빠지기 시작한다.

흔히 말하는 1.5세대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를 따라 이민을 가게되어 그곳에 정착한 사람을 말한다. 그들은 자의로 한국을 떠난 1세대와 처음부터 그곳에서 태어난 2세대와는 다르다. 분명 한국 태생이지만 사춘기를 낯선땅에서 보냈고, 그 곳의 말을 유창하게 사용하지만 정체성은 그곳에 속해있지 않은 (혹은, 속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다. 주인공인 '수지 박'은 그런 1.5세대이다. 한국계 미국인인 그녀는 29세의 통역사로, 한국어 통역일을 맡고 있다.

그녀의 이력은 간단하지만, 화려하다.
어릴적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왔으나, 첫사랑이 불륜(게다가 미국인)이라는 죄로 부모와 절연했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한국의 가부장이었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 앞에서는 입도 뻥긋 못하고 속앓이를 하시는 분이었다. 미국으로 이민을 왔음에도 아버지는 한국인의 뿌리를 중요시했고,그만큼 미국을 증오했다. 언니(그레이스)는 사사건건 그런 아버지와 부딪혔고 수지는 그 모습을 보고 자랐다. 그러나 정작 아버지의 뒷통수를 때린건 수지였고, 그 결과로 수지는 도망치듯 한인사회를 떠났다.  그러나 그 부모님도 5년전 강도의 총에 맞아 살해당하셨고, 하나뿐인 혈육인 언니와는 연락두절 상태다. 부모님의 사망으로 수지는 스스로 첫사랑과 끝을 맺었다. 그러나 인정받지 못한 첫사랑은 깊은 후유증을 남긴다. 그녀는 마치 사랑은 불륜만 할 것 처럼 현재에도 또 다른 남자와 그런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간간히 의뢰가 들어오는 통역업무.

조금은 나른하던 그녀의 일상은 부모님의 기일이면 어김없이 배달되어오는, 엄마가 좋아하던 아이리스 꽃을 받으면서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순간 궁금해진 것이다. '누가 해마다 이 꽃을 내게로 보내는가?'
그리고 얼마 안가서 나는 이 소설의 장르가 평범한 일반문학임이 아님을 알아챈다. 이 소설...'추리'다. 아니, 정확히 한 장르로 구분짓기 어렵다. 아주 미묘하게 의식 저 아래에 깔린 그 무엇을 자극하는 상당히 매력적인 소설이다. 통역사는 양쪽 언어의 중간자 역할이 아닌, 마치 탐정처럼 사건의 실마리를 풀고 있다. 차분하게 서두름 없이,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이 작품이 데뷔소설이라는 '수키 김'은 범상치 않은 글 솜씨를 선보인다. 흔히 추리소설이라면 기승전결이 뚜렷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클라이막스 부분에 이르면 독자들을 정신없이 사건의 중심으로 몰고간다. 그러나 수키 김은 속도의 완급과 강약조절이 능숙하다. 정신없이 몰아치기 보다는 중요할 때 한 걸음 물러서서 관망한다. 강한 실마리를 제공하고도 뜸을 들인다. 제 3자의 시점에서 서술하고 있기에 독자는 더욱 더 애가 탄다. 덕분에 나같이 성질 급한 사람은 뒤가 궁금한 탓에 읽는 속도에 탄력이 붙는다. 말 그대로 술술 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책의 마지막을 읽고 난 뒤의 기분이 썩 개운하지는 않다. 사건은 해결되었지만(아니 사건의 전말을 알았다고 해두자) 책에서 끊임없이 보여주던 이민 1세대들의 눈물겨운 투쟁, 1.5세대들의 애환이 영 마음에 걸리는 탓이다. 간혹 매체에서 다루던 극소수 '이민자移民者의 성공스토리'와 확연히 대조되는 그들의 삶에 마음이 아프다. 빨간색 바탕에 옛 교복을 입고 서있는 여학생의 표지가 무엇을 말하려 함인지 굳이 말해주지 않아도 알 것 같아,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꾹 참으면서 나는 책장을 덮는다.


덧) 수키 김은 이 책으로 미국 내에서 출판되는 다양한 인종과 색채의 문학 작품에 수여되는 '경계문학상'과 '구스타프 마이어 우수도서상'을 수상했다. 2004년에는 헤밍웨이 문학상의 후보작에 올랐으며, 미국 최대의 서점 반즈 앤 노블에서는 '올해 주목할 작가 10인' 중의 하나로 수키 김을 선정했다고 한다.

나의 독서수첩에도 기대되는 작가 목록에 '수키 김'의 이름을 써 넣는다.
데뷔작에서 이미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 그녀의 다음 행보를 기대해 본다.


++ 기억에 남는 문구
 
수지는 지방 검사보의 이야기를 들으며 중요한 단어를 수첩에 적는다. 통역을 할 때는 아무리 문장이 길더라도 모든 단어를 정확히 옮겨야 하다. 통역사는 수학자하고 비슷하다. 그녀는 방정식을 푸는 것처럼 언어를 대한다. 단어 하나하나마다 동의어와 맞추어야 한다. 한 치의 오차도 없어야 정답을 얻을 수 있다.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수지는 예전부터 이런 방면에 소질이 있었다. 두 가지 언어를 쓰면서 자란 환경 때문은 아니었다. 이민자 자식들이라고 해서 다들 통역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수지는 동시에 두 가지를 할 수 있는 남다른 능력이 있다. 그녀는 단어를 들으면 사전적인 의미와 함축적인 의미를 분리한다. 직역은 오역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언어는 논리적인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통역사는 단어를 그대로 옮기면서도 이쪽 언어와 저쪽 언어 사이의 간격을 교묘히 메울 줄 알아야 한다.

... 2에 2을 더하면 4가 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의미가 될 수 있음을 아는 사람이 진정한 해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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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5-11-19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그래서 더 좋았고 뜻밖의 보물을 얻은 기분이었답니다. 책 내용하고는 달리요...

다소 2005-11-19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맞아요 :) 오랜만에 소설책에 푹-빠져서 읽은 느낌이예요.^^